안동민속박물관
안동웅부(安東雄府)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복주(안동)로 몽진(1361)하였다가 환도한 후 이곳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친히 ‘安東雄府’란 현판을 써서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안동 관아에 걸려 있다가 1896년 행정구역 개편 후 안동군 청사에 걸려 있던 것을 1998년 5월 4일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수곡리 암각화(水谷里 岩刻畵) 이 암각화는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속칭 한들 뒷산에 위치한다. 선사시대에 제천의식을 거행했던 장소로 보여지는 이 암각화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수평면 암각화이다. 암각화가 새겨진 반석의 크기는 남북 30m, 동서 15m이며 그 평면상에 여러 가지 그림이 새겨져 있다. 대개 암각화는 강가의 수직 암벽에 새겨져 있는데 반하여 이 암각화는 산 위의 수평 암면에 새겨져 있고 또 유일하게 새와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말굽형 그림이 많아서 주목된다. 이러한 말굽형 그림은 중국 내이몽꾸 우란찹 지역의 것들과 동일하여 한ㆍ중 고대 문화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안막동 고분(安幕洞 古墳) 안동지방 고분군의 분포지는 낙동강의 좌우 연안 즉 안동시 태화동, 풍산읍 막곡리와 회곡리, 와룡면 중가구리, 임하면 신덕리와 추월리, 일직면 조탑리 등을 들 수 있다. 이 고분들은 주로 강변의 야산 능선 상에 열을 지어 분포하고 있으며, 형식은 석실묘와 토광묘로 되어 있다. 석실묘는 대부분 수혈식이 많으며 드물게 횡혈식도 보인다. 안막동 고분은 신라 횡혈식 석실분으로서 길이가 폭보다 넓은 장방형이고, 연도가 석실을 향해 오른쪽에 붙은 우연도형이며, 석실의 바닥이 연도 바닥보다 낮고 시상 윗면이 연도 바닥과 같은 높이로 되어있다.
동제당(洞祭堂) 동제당은 주로 마을 어귀에 있으며 수호신을 모시는 매우 신성한 곳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동제당은 당집, 동수, 돌무더기로 구성된 것이 일반적이나 당집만 있는 곳도 있다. 당집에는 다양한 신체를 모시고 있어 남신일 경우에는 이씨할배, 여신일 경우에는 김씨할매라고 부른다. 이는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개척한 입향조상을 의미한다. 동제당은 마을을 드나드는 부정한 것과 잡귀를 막아준다고 하여 골막이, 골맥이라고도 부르며 성황당, 국신다. 서낭당, 삼신당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동제는 주로 매년 음력 정월 보름(14일 밤 자시 11시에서 1시)에 지내지만 이른 아침 동틀 무렵에 지내는 곳도 있다.
기자 기자는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들이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소원을 비는 습속이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하였던 전통사회에서 부인들의 한결같은 바램은 아들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염원에서 비롯된 기자속에는 일정한 대상물에 기원하는 치성기자와 특정한 사물을 지니거나 특별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아들을 바라는 주술기자가 있다. 안동에서는 치성기자가 일반적이며 특히 봉황사 입구의 기자석, 서악사, 영남산의 탑골 등이 영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집안에 깨끗한 곳을 정해서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빌기도 한다.
석조불입상(石造佛立像) 이 불상은 머리부분은 남아있지 않으나 불상의 몸체와 받침대의 상태는 양호하다. 불상의 형태는 부처의 몸과 상부대좌를 하나로 조각하였고 하부대좌는 따로 조각하여 결합하고 있다. 수인(手印)의 모양은 오른손은 가슴에 두었고 왼손은 옷자락을 쥐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뒷면은 깨끗하게 다듬어 등 상부에 광배(光背)를 결구(結構)하기 위해 만든 사각형의 구멍이 있고 상부대좌에도 구멍이 있다. 현재 광배는 남아있지 않으나 불신(佛身)과 대좌의 구멍으로 볼 때 원래 별도의 광배를 제작하여 끼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작 연대는 옷 주름과 세부적인 표현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석불로 추정된다. 불상을 모셨던 사찰은 흔적을 찾을 길 없어 알 수 없고 불상만 안동시 서후면 광평리 산기슭에 묻혀 있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와서 보관하고 있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예부터 안동에는 선정비(善政碑)나 공적비(功績碑)를 세워 치적을 알리고 드러내는 것은 예스럽지 않다고 생각하여 세우지 않았으므로 “안동무비(安東無碑)”라는 말이 전한다. 그러나 이 비는 영조 51년(1775)에 영의정이 된 김상철(金尙喆, 1712~1791)과 정조 19년(1795)에 영의정에 오른 이병모(李秉模, 1742~1806) 양공(兩公)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할 당시에 선정(善政)을 베푼데 대한 은혜와 덕을 영원토록 기리기 위해서 안기역민(安奇驛民)들이 정조 10년(1786)에 세운 것으로써 아주 더문 사례이다. 김상철 공의 본관은 강릉이고 호는 화서(華西)이며 영조 1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병모 공의 본관은 덕수이고 호는 정수재(靜修齋)이며 영조 49년에 진사가 되고 그 해에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하였다. 비문(碑文)은 바위를 다듬어 음각하였는데 전면에 ‘觀察使金相國尙喆永世不忘碑 觀察使李相國秉模永世不忘碑’라 새겼다. 이 비는 이천동 산 154번지 국도 7호변 암벽에 새긴 글씨로 남아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비문(碑文) 부분만 절단하여 부근에 옮겨두었다가 박물관이 개관되자 1993년 이곳으로 옮겨와서 보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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