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三多와 三無
[출처] 안동 도산서원 [安東 陶山書院 ] | 네이버 백과사전
안동의 三多와 三無
가. 삼다(三多) 1) 산다(山多) 2) 인다(人多) 3) 원다(院多)
나. 삼무(三無) 1) 만석거부(萬石巨富) 2) 송덕비(頌德碑)
3) 향리(鄕吏) 성내거주자(城內居住者)
[안동의 三多와 三無]
[글 : 류희걸]
삼다(三多) 삼무(三無)는 세 가지 많은 것과 세 가지 없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지방마다 지역(地域) 특성(特性)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정해진다.
대구(大邱)의 삼다 는 능금, 자전거, 막걸리이고
제주도(濟州道)는 바람, 돌, 여자다.
이처럼 삼다와 삼무가 지방마다 있는 까닭은 그 지역(地域)의
특성을 인상(印象)깊게 외지(外地)로 알리고자 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일종의 선의적(善意的)인 자기 고향(故鄕)의
홍보(弘報)수단(手段)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사다(四多), 오다(五多) 또는 육다(六多), 칠무(七無)라 하질 않고
반드시 삼다, 삼무. 로만 정하는 이치(理致)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 그것은 모르긴 해도 우리네 조상(祖上)들의 오랜 생활 습속(習俗)에서
굳어진 ‘삼(三)’자 숭상(崇尙) 유풍(遺風)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컨대 사람이 태어나면 삼칠, 죽으면 삼년상과 같이 사례(四禮)를
중심한 통과의례(通過儀禮)에서 삼을 앞세우는 것들이 많다.
바로 삼상향(三上香), 삼강(三綱), 삼보(三寶), 삼성(三省), 삼당(三堂) 등이
그것들이니 이런 맥락(脈絡)에서 기인(起因)된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성씨만 하더라도 경주(慶州)는 박, 석, 김, 예천(醴泉)은 반, 송, 임 이고,
안동은 김, 권, 장이며 또 전주(全州)는 이, 류, 최씨가 삼성(三姓)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안동의 삼다(三多)와 삼무(三無)를
다음과 같이 정(定)하고 그 배경(背景)을 이렇게 적는다.
▣ 삼다(三多)
1) 산다(山多)
산이 많다는 이야기다. 안동은 예부터 산이 많은 곳이다.
다른 곳에는 산이 없으랴만 행정구역(行政區域)상으로
들판보다 산이 많다는 통계(統計)에 근거(根據)를 두었다.
옛날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자고(自古)로 안동을 일러
산다야소(山多野小)라 했음은 여기서 온 말이니 산다(山多)일 수밖에 없다.
2) 인다(人多)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시민 전부를 합쳐도 20만이 못되는데
뭐가 그렇게 많다는 것일까? 사람이 많다. 라고 함은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바로
학문(學問)과 예절(禮節) 바르고 지체(肢體)높은 어진 선비와
명현(名賢) 석학(碩學)들이 많다는 뜻이다.
<東國人物 半在嶺南>이요 <嶺南人物 半在安東>이라 한다.
이처럼 수많은 인물들이 있는 선비의 고장, 예절(禮節)의 고장,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으니 곧 인다(人多)이다.
3) 원다(院多)
[출처] 안동 도산서원 [安東 陶山書院 ] | 네이버 백과사전
서원(書院)이 많다는 뜻이다.
지금도 안동을 교육(敎育)의 도시(都市)라 하지만
옛날에도 교육(敎育)의 기풍(氣風)이 대단했음을 서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려(高麗)이래 조선조(朝鮮朝) 말기(末期)에 이르기까지
유일(唯一)한 교육기관(敎育機關)은 서원(書院)과 향교(鄕校)였다.
안동은 그 당시 무려 62개의 원우(院宇)가 있었고
지금도 신구(新舊) 서원(書院)은 모두 26개소(個所)가 남아 있다.
이처럼 전국에서 서원이 제일 많은 곳이 바로 안동이다.
▣ 삼무(三無)
1) 만석거부(萬石巨富)
안동은 예로터 만석거부는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동을 재빈도부(財貧道富) 고을이라 했다.
비록 살림은 가난해도 도덕만은 풍부하다는 뜻이다.
더욱이 산다의 고장이라 했으니 산이 많으면 상대적으로 들판은 적다.
들이 적으면 결과는 부자가 없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양반은 대추 하나로 요기(療飢)한다>는 속담처럼 안동사람은
오로지 도학만을 숭상(崇尙)하는 참신하고도 어진 선비들만 사는
곳으로 물욕(物慾)은 있을 수가 없고 치부(致富) 또한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만석거부가 없다는 말은 당연지사(當然之事)이다.
2) 송덕비(頌德碑)
송덕비가 없다. 송덕비란 한 관리(官吏)가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赴任)하여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소임(所任)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떠난 뒤에
고을 백성들이 그 분의 업적(業績)을 찬양(讚揚)하여 전 주민들의
공의(共議)를 거쳐 세워주는 비(碑)다.
여기서 언급해 두고자 하는 것은 송덕비란 공덕(功德)
또는 공적비(功績碑)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그것들은 개인의 업적을 소수(小數)인들의 의견(意見)만으로
세울 수도 있는 것이나 송덕비는 그렇지 않는데서 구별된다.
다른 지방에는 송덕비가 많은데 유독(惟獨)히 안동사람들 만이
송덕비를 세우지 않았음은 너무 인색(吝嗇)하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이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본인은 시각(視覺)을 달리한다.
고을의 수령(守令)은 공인(公人)으로서 목민(牧民)에 성실(誠實)해야 함은
당연지사(當然之事)이다. 수령(守令)이 조정(朝廷)의 명을 받았다면
그 소임을 다해야 됨은 재론(再論)이 필요없다.
필연(必然)적인 소임(所任)앞에 잘했다고 송덕비를 세운다는 것은
그 자체(自體)가 개인의 독립(獨立)된 고유행각(固有行脚)인양
오도(誤導)되어 상(임금)을 무시(無視)하는 처사(處事)로 보기 때문이다.
수령의 선정(善政)은 한 개인의 독선(獨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마땅히 나라님의 분신행각(分身行脚)이 되어야만 옳다.
이런 맥락(脈絡)에서 볼 때 충성을 생활(生活)신조(信條)로 살아가는
안동 고을 백성들이 임금 아닌 다른 사람의 비를 세울 턱이 만무(萬無)하다.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절대(絶對)충성(忠誠)을
대변(代辯)해 주는 단적(端的)인 표현(表現)이라 하겠다.
이러한 까닭에 안동은 예로부터 송덕비를 세우지 않았다.
3) 향리성내거주자(鄕吏城內居住者)
고을의 향리는 성내에 거주하지를 않는다.
향리는 아전(衙前)을 말하는데 이들은 중앙 또는 지방의
주, 부, 군, 현에 근무하는 하급관리로 인리(人吏), 서리(書吏)라고도 한다.
향리는 지방에 누대로 살면서 대대로 아전을 지내는 자이고
가리(假吏)는 타곳에서 임시로 와서 아전생활을 하는 자를 말한다.
이들 아전 중에 중앙 부서에 근무하면 경아전(京衙前)
지방에 근무하면 향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향리가 성내(城內)에 거주(居住)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향리가 성내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대수냐?
반문이 있기 전에 먼저 설명(說明)하자면 안동의 아전(衙前)들은
일과(日課)가 끝이 나면 곧바로 자기(自己)의 동리(洞里)로 퇴청(退廳)을 한다.
밤에는 마을의 초당방(草堂房)에 들려 백성(百姓)과 함께 담소(談笑)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 누구는 어째서 슬프고 어떤 사람은 어디가 아프며
또 어느 누구는 어떤 점이 좋고 나쁘다는 여론을 모두 듣고
다음날 아침에 등청(登廳)하여 사또게 그 사실을 직고(直告)해 줌으로써
백성의 소리를 사또가 가납(嘉納)하여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소임을
그야말로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했다는데 그 의의(意義)는 자못 크다고 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정부가 부르짖고 있는 민의수렴(民意收斂)이다.
안동향리의 지혜를 생각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상으로 안동의 삼다, 삼무를 정리해 보았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絶對的)일 수는 없다.
그러나 안동의 역사(歷史)와 안동사람의 기질(氣質)과 지방특성(地方特性)을
이해(理解)하는데 일조(一助)가 되리라고 믿는다. 끝.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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