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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영웅 현봉학 의학박사 이야기 - 회곡.

아까돈보 2014. 12. 27. 12:52

 

 

 

 

 

6.25 전쟁영웅 현봉학 의학박사 이야기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에 새겨진 현봉학 박사의 모습

 

12월의 6·25전쟁영웅 현봉학 의학박사
 (1922.6.23∼2007.11.25)

 ◈ 이대로 철수하면 저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


 국가보훈처는 현봉학 의학박사를 12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현봉학 의학박사는 1922년 함경북도 성진 출생으로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으며 광복 후 가족과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 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의대에서 학업을 수행한 후

 귀국한 현봉학 박사는 민간인 신분으로

1950년 8월초 미군의 통역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국 해병대의 통역을 맡게 된 그는

 해병대의 입과 귀가 되어 미군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그들의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낙동강전선에서

진동리 및 통영전투의 승리에 일조하는 등 생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누비며 통역을 맡아 우리군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또한 전선시찰을 위해 사령부를 방문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민사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흥남철수작전에서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 주었다.

 

 당시 전황은 전쟁발발 한 달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북한군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38도선을 넘어 압록상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을 계속하였으나

 10월 하순경부터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바뀌었다.

 

 장진호 일대에서는 8만 명의 중공군에 의해 2만의 미 해병1사단이 포위되었고

 그 북쪽에 있던 미10군단 부대도 고립되었다.

 그런데 중공군 못지않은 무서운 적은 밤에는 영하 30도 가까이 내려가는 날씨였다.

수많은 병사들은 처음 겪어보는 무서운 혹한에 노출되어 쓰러지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병사들도 동상으로 손발을 잃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황초령을 넘어 철수하면서 해병대원들은 탈출로를 막아대는

중공군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흥남으로 향해 앞으로 나갔다.

 흥남철수작전은 중공군이 원산을 점령함에 따라 해상으로 철수하는 작전으로

 흥남항을 통한 해상철수만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해상철수는 전쟁행위 중 가장 위험한 작전으로 흥남함에는

후송할 인력과 장비 또한 엄청난 규모로

10만 여명의 인력과 50만톤의 장비 및 물자가 선적을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 흥남항에는 많은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그 들 대부분은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유엔군에 협조하거나

기독교인 등이 대부분으로 흥남항에서 승선하지 못하면

많은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처지였으나,

작전을 책임진 알몬드 소장의 입장에서는

10만 여명에 달하는 미 제10군단 병력의 철수도 어려운데

민간인 철수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현봉학 박사는 알몬드 소장을 찾아가 “적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는데,

이들 민간인들이 어디로 갈 수 있겠느냐?”고 여러번 간청과 설득하였고

 그의 열성에 감동한 알몬드는 결심을 바꾸어 군수물자의 철수를 포기하고 9만 8천여 명을

 메러디스 빅토리호 등의 수송선으로 거제도로 오게 하였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수 많은 주민을 구하는데

열과 성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민족애와 휴머니즘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피난민들의 흥남 탈출은 숨겨진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그를 두고 ‘한국판 쉰들러’로 부르고 있다.

또한 그는 故현시학 제독의 형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한 그는 조국에서 의술을 베풀었는가 하면

보건부장관 고문을 역임하였으며,

 미국 의과대학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 등으로 재직하면서

한미 의학계에 공헌 및 인류 의학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2007년 11월 25일 자신이 근무했던 미국 뉴저지주의 뮐렌버그 병원에서 영면하였다.

 

 

 

 

 

 

 

현봉학(玄鳳學)은 이름 석자 뒤에 다양한 호칭이 붙은,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이름 뒤에 일생동안 따라다닌 호칭은 선생, 교수, 박사, 회장, 이사장, 위원장, 편집장, 고문 등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알맞은 호칭은 선생님이다. 그가 학교에서 가르친 일부 학생들의 선생이 아니라 그는 사회의 선생이고 민족의 선생이고 인류의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동안 받은 상의 일부를 잠깐 살펴봐도 현봉학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감사가 어떠하였는지 쉽게 엿볼 수 있다. 뮤렌버그보건재단에서 수여하는 윌리암 오가스타 상(1980), 뮤렌버그병원(뉴저지 주립의과대학 교육병원)의 병리학교실을 “현봉학 병리검사실”로 명명(1988), 미국임상병리학회에서 수여하는 Distinguished Service Award Honoring Israel Davidsohn(1992), 서울특별시가 수여하는 조국을 빛낸 해외동포상(1995), 연세대학교가 수여하는 제1회 학술대상(1996),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수여하는 Global Korea Award(1996), 한국서재필기념사업회가 수여하는 제2회 서재필 의학상(2005) 등은 그가 받은 많은 상들 중 일부이다.



1923년에 출생한 선생은 1944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에 모교에 강사로 일하면서 임상병리학교실을 창설하였다. 선생은 좀 더 많은 수련과 깊은 연구를 위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1959년에는 소위 아이비리그 명문대그룹 중의 하나인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그 이후 버지니아주립의대, 뉴욕의 콜롬비아대학의대, 뉴저지주립의대, 필라델피아의 토마스 제퍼슨의대에서 조교수, 부교수, 교수를 거치면서 보여준 그의 헌신적인 연구와 교수 활동이 임상병리학계에서 세계적인 거목으로 인정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자마자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 내 의학 전반 특히 임상병리분야의 발전을 위해 많은 학문적 도움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1987년부터는 조선족 자치구인 연길에 있는 연변의대에서 명예교수로 거의 20년간 활약했다. 무려 27년간이나 병리과장으로 봉직 해 온 뉴저지 뮐렌버그병원에서는 그 병원의 병리학 교실을 “현봉학 병리검사실”로 명명할 정도로 깊은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뉴저지병리학회에서 10여 년간이나 학술위원과 위원장으로 일하였고, 미국병리학회지 편집위원으로도 16년간이나 활약하였다. 특히 선생의 전문분야인 `재미 한인병리학회' 회장으로도 봉사하였다.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의 제1호 서양의사이며, 언론인이며, 민족의 선각자이고 애국지사인 서재필의 애국애족 사회봉사 사상을 기리는 `서재필기념재단'이 1976년에 설립되었는데, 이 재단 설립에 선생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초대 이사장을 맡아 재단의 발전과 봉사의 활성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설립한지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지속적인 기여를 인정받아 2004년에는 미국 서재필기념재단으로부터 `서재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1950년에 대한민국 해병사령관 고문으로도 근무하였고, 미10군단 사령관 민사부 고문으로도 근무하면서 한국전쟁에 참여하였는데, 특히 1951년에 있었던 소위 흥남철수작전에 선생이 주역으로 참여하여 민간인 10만 여명을 구출한 사건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85년에 `미·중 한인우호협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으로 2007년까지 봉사했으며, 이를 통해 미주지역의 한인과 중국 조선족의 우호증진 및 문화교류에 온 정성을 쏟아 부었다. 특히 기억 해 두어야 할 사건은 중국 용정지역에 있었으나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아져 가고 있던 민족 시인 윤동주의 묘소를 수소문 끝에 찾아내어 묘지를 깨끗이 수리하고 묘비도 세우는 등 새롭게 조경도 하여 많은 관광객의 참배 명소로 만든 것도 선생의 끈질긴 노력의 산물이다.


1993년에는 국제고려학회를 창설하여 남북한의 의학자들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의학자들이 다 한자리에 모여 `한민족 의학학술대회'를 반복 개최함으로써 의학을 통한 한민족 화합의 장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3년 동안이나 지속하기도 하였다.



75세가 되는 1997년부터는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의 임상병리학과 초빙교수로 5년간 활발한 교수활동을 계속하였다.



감명을 주는 인간 현봉학, 교육과 연구에 열중하는 의학자 현봉학, 애국애족을 생활화한 애국자 현봉학은 현대를 살고 있는 모든 후배와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위대한 선생임에 틀림없다.


집필 : 전세일(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 교수)

1982년 7월, 뮐렌버그 병원 연구실에서.

 

1950년 10월, 강원도 고성 해병대 사령부에서.

맨오른쪽이 현봉학 박사.

 

1950년 12월 20일, 흥남 철수 광경.

 

10만 명의 민간인을 구한 흥남철수작전의 주인공 현봉학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통일을 염원하며 이산가족 재상봉과 재결합을 위해서 평생 노력했다.


profile 현봉학 박사(1922-2007)

1944년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뒤, 한국전쟁 직후 미국으로 건너가 1959년 펜실베니아 대학원에서 의학박사(임상병리학) 학위를 받았다. 이후 컬럼비아 대학, 뉴저지 주립의대, 토마스 제퍼슨 의대 교수 등을 지냈다.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중공군에 포위당한 국군과 유엔군이 철수 작전을 펼친 ‘흥남 대탈출’ 당시, 미 10군단 고문관이었던 현 박사는 미군을 끈질기게 설득해 함경도민 98,000여 명을 군 수송선에 태우고 무사히 거제도로 후송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199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임상병리학 연구로 미국임상병리학회(ASCP)가 주는 세계적 권위인 ‘이스라엘 데이비슨상’을 수상했고, 1996년 제1회 연세의학대상을 수상했다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하겠다


1950년 12월, 흥남 부두에는 중공군을 피해 남한으로 가려는

 10만 명의 피난민들이 몰려와 있었다.

 피난민들은 기다림에 지쳐만 갔고, 추위와 굶주림은 수많은 피난민의 생명을 앗아갔다.

당시 북한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과 한국군은 예상하지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급박하게 철수에 들어갔다. 군인들도 철수하기 바쁜 마당에

 함경남도에 거주하던 민간인들의 철수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혼란과 공포에 휩싸여

고통스러워하는 수십만의 주민들.

 이때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 의사가 나섰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944년 졸업생이자 당시

 미 10군단 고문관으로 근무하던 현봉학(玄鳳學, 1922-2007)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현봉학은 함흥과 흥남이 다시 공산당의 지배 아래 놓이면

기독교인을 포함한 주민들을 박해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고통을 충분히 예견하면서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고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하겠다고 결심했다”

라고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그는 자서전에 남겼다.

 그 기록처럼 그는 정말 모든 일을 다했다.

 현봉학은 미 10군단 사령관인 알몬드 소장을 만나

민간인 철수를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사실 사령관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매우 곤란한 문제였다.

군단 병력의 철수가 우선인데다 민간인 철수를 상부의 지시 없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흥남부두의 시설은 매우 열악했고,

 피난민 중에는 북한군이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현봉학의 거듭된 설득으로 마침내 사령관의 마음은 움직였다.

 군함을 이용한 민간인 철수를 결정했던것.

그 결과 10만의 함경도민들은 흥남을 떠나 남한으로 향했다.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의 노력으로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뮐렌버그 병원의 ‘현봉학 임상병리교실’


현봉학을 10만의 피난민을 철수시킨 흥남철수작전만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훌륭한 임상병리학자이기도 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기독병원에서 인턴을 마친 현봉학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서울로 옮겨와 새로운 근무처를 찾았다.

 

그 과정에서 만난 미 감리회 선교사 애리스 윌리엄스의 주선으로

 1947년 9월 미국 유학을 떠난다.

 목적지는 윌리엄스 부인의 아들인 윌리엄스 박사가 근무하던

 리치몬드의 버지니아 주립대학이었다.

윌리엄스 박사는 당시 임상병리학 분야에서는

미국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현봉학은 그의 지도 아래 한국에서는 생소한

 임상병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1949년 귀국한 현봉학은 모교인 세브란스의과대학에

 임상병리학이라는 학문을 이식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혈액학, 혈청학, 세균학, 생화학, 혈액은행 개념이 합쳐진

 새로운 학문이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곧 발발한 한국전쟁에 그는 참전했고, 미 10군단 사령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흥남철수작전을 주도하게 된다.1953년 종전 즈음 그는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뮐렌버그 병원과 뉴저지 주립의과대학에 자리를 잡은 후 그곳에서 정년을 맞았다.

 뮐렌버그 병원에서는 그의 업적을 인정해 그가 정년퇴임한

 1988년 새롭게 전산화된 임상병리학 연구실을

 ‘현봉학 임상병리교실’이라고 명명했다.

 현봉학은 자신을 ‘한국의 쉰들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반성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시 흥남에서 10만 명의 피난민 탈출을 도왔지만 나는 적어도

 약 100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혹시 자신이 이산가족을 만들어 그들의 삶을

 망가트린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런 다짐을 했다.

 “이산가족 재상봉과 재결합은 나의 생애를 두고 노력하고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가 1985년 설립된 미중 한인우호협회나 1991년 창설된 국제고려학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유도 위의 결심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2007년 11월 25일 자신의 반생을 보냈던

미국 뮐렌버그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 펌글

 

요즘 극장가에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는

 <국제시장>영화를 보시면 전쟁영웅 현봉학 박사의

이야기도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