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영웅 현봉학 의학박사 이야기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에 새겨진 현봉학 박사의 모습
12월의 6·25전쟁영웅 현봉학 의학박사 ◈ 이대로 철수하면 저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
현봉학 의학박사는 1922년 함경북도 성진 출생으로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으며 광복 후 가족과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 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의대에서 학업을 수행한 후 귀국한 현봉학 박사는 민간인 신분으로 1950년 8월초 미군의 통역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국 해병대의 통역을 맡게 된 그는 해병대의 입과 귀가 되어 미군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그들의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낙동강전선에서 진동리 및 통영전투의 승리에 일조하는 등 생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누비며 통역을 맡아 우리군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또한 전선시찰을 위해 사령부를 방문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민사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흥남철수작전에서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 주었다.
당시 전황은 전쟁발발 한 달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북한군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38도선을 넘어 압록상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을 계속하였으나 10월 하순경부터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바뀌었다.
장진호 일대에서는 8만 명의 중공군에 의해 2만의 미 해병1사단이 포위되었고 그 북쪽에 있던 미10군단 부대도 고립되었다. 그런데 중공군 못지않은 무서운 적은 밤에는 영하 30도 가까이 내려가는 날씨였다. 수많은 병사들은 처음 겪어보는 무서운 혹한에 노출되어 쓰러지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병사들도 동상으로 손발을 잃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황초령을 넘어 철수하면서 해병대원들은 탈출로를 막아대는 중공군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흥남으로 향해 앞으로 나갔다. 흥남철수작전은 중공군이 원산을 점령함에 따라 해상으로 철수하는 작전으로 흥남항을 통한 해상철수만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해상철수는 전쟁행위 중 가장 위험한 작전으로 흥남함에는 후송할 인력과 장비 또한 엄청난 규모로 10만 여명의 인력과 50만톤의 장비 및 물자가 선적을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 흥남항에는 많은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그 들 대부분은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유엔군에 협조하거나 기독교인 등이 대부분으로 흥남항에서 승선하지 못하면 많은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처지였으나, 작전을 책임진 알몬드 소장의 입장에서는 10만 여명에 달하는 미 제10군단 병력의 철수도 어려운데 민간인 철수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현봉학 박사는 알몬드 소장을 찾아가 “적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는데, 이들 민간인들이 어디로 갈 수 있겠느냐?”고 여러번 간청과 설득하였고 그의 열성에 감동한 알몬드는 결심을 바꾸어 군수물자의 철수를 포기하고 9만 8천여 명을 메러디스 빅토리호 등의 수송선으로 거제도로 오게 하였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수 많은 주민을 구하는데 열과 성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민족애와 휴머니즘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피난민들의 흥남 탈출은 숨겨진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그를 두고 ‘한국판 쉰들러’로 부르고 있다. 또한 그는 故현시학 제독의 형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한 그는 조국에서 의술을 베풀었는가 하면 보건부장관 고문을 역임하였으며, 미국 의과대학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 등으로 재직하면서 한미 의학계에 공헌 및 인류 의학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2007년 11월 25일 자신이 근무했던 미국 뉴저지주의 뮐렌버그 병원에서 영면하였다.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하겠다 10만 명의 피난민들이 몰려와 있었다. 피난민들은 기다림에 지쳐만 갔고, 추위와 굶주림은 수많은 피난민의 생명을 앗아갔다. 당시 북한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과 한국군은 예상하지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급박하게 철수에 들어갔다. 군인들도 철수하기 바쁜 마당에 함경남도에 거주하던 민간인들의 철수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혼란과 공포에 휩싸여 고통스러워하는 수십만의 주민들. 이때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 의사가 나섰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944년 졸업생이자 당시 미 10군단 고문관으로 근무하던 현봉학(玄鳳學, 1922-2007)이었다.
기독교인을 포함한 주민들을 박해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고통을 충분히 예견하면서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고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하겠다고 결심했다” 라고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그는 자서전에 남겼다. 그 기록처럼 그는 정말 모든 일을 다했다. 민간인 철수를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사실 사령관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매우 곤란한 문제였다. 군단 병력의 철수가 우선인데다 민간인 철수를 상부의 지시 없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흥남부두의 시설은 매우 열악했고, 피난민 중에는 북한군이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현봉학의 거듭된 설득으로 마침내 사령관의 마음은 움직였다. 군함을 이용한 민간인 철수를 결정했던것. 그 결과 10만의 함경도민들은 흥남을 떠나 남한으로 향했다.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의 노력으로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그는 훌륭한 임상병리학자이기도 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기독병원에서 인턴을 마친 현봉학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서울로 옮겨와 새로운 근무처를 찾았다.
그 과정에서 만난 미 감리회 선교사 애리스 윌리엄스의 주선으로 1947년 9월 미국 유학을 떠난다. 목적지는 윌리엄스 부인의 아들인 윌리엄스 박사가 근무하던 리치몬드의 버지니아 주립대학이었다. 윌리엄스 박사는 당시 임상병리학 분야에서는 미국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현봉학은 그의 지도 아래 한국에서는 생소한 임상병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임상병리학이라는 학문을 이식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혈액학, 혈청학, 세균학, 생화학, 혈액은행 개념이 합쳐진 새로운 학문이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곧 발발한 한국전쟁에 그는 참전했고, 미 10군단 사령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흥남철수작전을 주도하게 된다.1953년 종전 즈음 그는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뮐렌버그 병원과 뉴저지 주립의과대학에 자리를 잡은 후 그곳에서 정년을 맞았다. 뮐렌버그 병원에서는 그의 업적을 인정해 그가 정년퇴임한 1988년 새롭게 전산화된 임상병리학 연구실을 ‘현봉학 임상병리교실’이라고 명명했다. 자기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반성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시 흥남에서 10만 명의 피난민 탈출을 도왔지만 나는 적어도 약 100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혹시 자신이 이산가족을 만들어 그들의 삶을 망가트린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산가족 재상봉과 재결합은 나의 생애를 두고 노력하고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가 1985년 설립된 미중 한인우호협회나 1991년 창설된 국제고려학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유도 위의 결심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2007년 11월 25일 자신의 반생을 보냈던 미국 뮐렌버그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 펌글
요즘 극장가에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는 <국제시장>영화를 보시면 전쟁영웅 현봉학 박사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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