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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락호(破落戶) / 직언 가풍(直言 家風) - 갈.

아까돈보 2015. 1. 19. 21:27

 


파락호(破落戶)
 
한자어로 ‘파락호’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반집 자손으로써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를 의미합니다.
 
이 파락호 중에 일제 식민지 때 안동에서 당대의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학봉 김성일의 종가 
13대 종손인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노름을 즐겼다고 합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고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배팅이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치는 수법을 사용 했다고 합니다.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 백 년 동안의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도 다 팔아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팔아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다고 합니다.
 
“집안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 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시집간 무남동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농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마저도 친정아버지인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수 없어서 
친정 큰 어머니가쓰던 헌장농을 가지고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정도니 주위에선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 졌습니다.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야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용환은 독립군의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살면서도 자기 가족에게까지도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지금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이
이 김용환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용환의 무남동녀 외딸로서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받은 돈도
아버지가 노름으로 탕진하여 
어머니의 헌 농을 싸가지고 간 김후옹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습니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옮긴 글    
-道 經-

 

직언 가풍 (直言 家風)

아래 글은

조선일보 2014년 12월 22일자A33면의

 "조용헌의 살롱"에 실은 내용입니다.

 

 

 

직언 가풍 (直言 家風)

 

한국의 선비 집안 가운데 유달리 직언(直言)을 많이 하는 유전인자가 있는 집안이 있다.

안동의 '내앞(川前)'에 사는 의성 김씨 집안이다.

 이 집안 중시조인 청계공이 정한 가훈도 파격적이다.

 '신하가 됐으면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온전한 기왓장으로 남지 말아라(爲人臣子 寧須玉碎 不宜瓦全)'. 임금에게 직언해서 부서지는 옥이 되라는 말이다.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히고 살지 말라(人寧直道以死 不可枉道以生).

' '벼슬은 정3품 이상 하지 말고 재산은 300석 이상 하지 말라.'

'선비 집안에는 금부도사(대검찰청 검사)가 3번은 찾아와야 한다

.' 실제로 이 집안에는 임금이 보낸 금부도사가 영남 사림(士林)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하여 3번이나 찾아왔던 적이 있다.

청계공의 아들인 학봉(鶴峯)은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이라는 벼슬에 있을 때

'요순걸주론(堯舜桀紂論)'의 직언으로 유명했다.

선조 임금이 '나를 선대의 군왕에 비교하면 누구와 비슷한가?

' 하고 언관(言官)들에게 물은 적이 있다. 한 언관이 '요순과 같은 성군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학봉은 '요순도 될 수 있지만 걸주도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성인(聖人)인 체하고 직언을 멀리하는 병통이 계시니 이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 면전에서 대놓고 돌직구를 날린 셈이다.

학봉의 손자인 김시추(金是樞)는 당대의 실세 권력자인 이이첨의 목을 베어야 한다(請斬李爾瞻疏)는 내용의 '영남만인소(萬人疏)'(1621)의 소수(疏首)가 됐다.

소수는 만명이 올린 상소문의 제일 앞에 서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차하면 제일 먼저 죽어야 하는 역할이 '소수'이다.

숙종 연간에는 '청음서원 훼파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에 안동은 핍박받는 야당 도시이자, 남인의 본거지였다.

여기에 집권당 노론의 핵심 인물인 청음 김상헌을 기념하는 서원을 세우려고 하자 남인들이 들고일어났다.

신축 중인 청음서원의 대들보에다가 밧줄을 걸어 건물을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학봉의 6세손인 김몽렴(金夢濂)이 제일 앞장섰다.

'川金錚錚(내앞 김씨들은 쇳소리가 난다)'이라는 평판은 이렇게 얻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