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末 三隱(삼은)의 한 사람인 李穡(이색)을 비롯하여 四六臣의 한 사람인 李塏(이개),大文章家 李山海(이산해) 等으로써 이름난 韓山李氏는 朝鮮時代 相臣 4名,大提學(대제학) 2名, 淸白吏(청백리) 5名,功臣 12名과 文科 及弟자 195 名을 輩出했다.
李種善(이종선)은 名門으로서 驪興府使 等을 지내고 1417年 豊海道와 忠淸道의 都觀察使를 歷任한 後 門城留後(문성유후)에 이어 中樞院使(중추원사)를 지냈다 李孟均(이맹균)은 1385年 文科에 及弟,成均直學(성균직학)을 거쳐 朝鮮開國(조
선개국)後 1418年 忠淸道觀察使가되고 이듬해 漢城府尹을 지냈으며 1425年 陳尉使(진위사)로 明나라에 다녀온뒤 吏曺와 兵曺의 判書, 大司憲 等을 거쳐 右贊成(우찬성)에 이어 左贊成(좌찬성)에 이르렀다.
高麗末의 碩學(석학)이요,大儒(대유)로서 朝鮮朝 性理學 發展에 功獻한 李穡은 元나라 制科에 及弟, 恭愍王 때 門下侍中(문하시중)에 이르렀다.朝鮮이 開國하자 驪州,長興 等地로 流配되고 끝까지 節介를 지키다가 驪江(여강)으로 가던중 奸臣들에 依해 舟中暴死(주중폭사)하였다.有名한 四六臣의 한사람인 李塏 또한 韓山李氏 家門을 不事二君의 忠節로서 빛낸 人物이었다.그는 1436年 文科에 及弟하여 訓民正音의 創製에 參與,1447年 文科重試에 及弟한 뒤 1456年 直提學에 이르렀다. 成三門(성삼문), 朴彭年(박팽년) 等과 함께 端宗의 復位를 꾀하다가 發覺되어 죽음을 當하였다.
近世人物로는 獨立運動家이자 社會運動家였던 月南(월남) 李商在(이상재)를 들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