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양반이란?
유교에서 선비는 과거시험을 보아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즉 출세하여 자기이름을 날리고 더불어서 가문의 명예를 드 높이는것만이 해야 할 유일한 지상목표라고 단언한다. 중국 유가들도 그렇했고 조선선비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출세를 하지 못하면 시골로 들어 앉아 자기관리를 엄격하게 하여 도덕심과 전통을 지키고 처사로서 가끔 상소를 올려 살아있음 서울에 있는 출세한 양반한테 알리곤 했다
그렇다면 안동양반이란??? 그 들은 출세한 양반이 아니라 시골로 들어 앉아 꿋꿋하게 도덕을 지킨 때론 고루한 양반들이다
여기 소산마을은 안동김씨의 본향이다. 반청주의자로서 청나라와 싸우자고 했던 청음 김상헌의 고향으로서 조선시대 이 마을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한 사람이 11명이나 된다 김계향(대사성), 김영중(부사), 김영(관찰사), 김상헌(좌의정), 김영수(영의정) 등등...
안동에서 풍산읍을 지나면 소산마을이 나온다
마을 초입에는 김상헌의 시비가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삼구정, 노모(예천권씨)를 위해 지은 정자로서 조선시대 정자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다
솟대, 옛날에 과거에 급제하면 솟대를 만들었다 한다. 비석에는 이마을 출신 과거급제자 명단이 나와있다
삼구정 모습
삼구정 앞 소나무가 일품이다
삼구정안에는 온갖 문인들의 시비가 그득하다. 이것은 권력의 속성을 말해주는 듯...
삼구, 세개의 거북형상의 돌
삼구정에서 바라본 황금빛 들판
소산마을 전경, 저 안에 청원루(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누각)가 있다
풍산들판을 가로 질러 낙동강변으로 가면 유성룡이 제자들을 가르켰던 병산서원이 나온다. 병산서원 건축미의 백미는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변 풍경이다. 마치 부석사의 절경이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풍경과도 같은 이치이다
병산서원 입구
미국 조지부시 대통령 부부 방문 기념식수
만대루
만대루 밑 모습
위의 모습
바라는 낙동강 풍경
서원의 중심건물인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전경
병산서원 앞에 있는 무궁화나무
안동김씨는 선 안동과 후 안동이 김씨가 있는데 시조가 다르다 선 안동김씨는 신라 경순왕 넷째아들의 둘째 아들인 숙승을 시조로 하고 고려 때 장수 김방경을 중시조로 하며 인조때 김자점, 독립지사 김구 등이 이집안 출신이다
후 안동김씨는 삼태사 중 하나인 김선평의 후예로 그의 9대손 되는 김삼근이 비안 현감에서 물러나면서 이곳 소산(시미마을)에 정착하여 입향조가 되니 그 후손을 비안공파라 한다
비안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계권은 한성부 판관을, 둘째 계행은 대사성을 지냈다 둘째 아들 김계행은 무오사화때 부당함을 상소하고는 소산으로 낙향하고 이후 길안 묵계로 옮겨 그의 후손들은 거기에 칩거하게 된다 무계 종택, 만휴정이 모두 그 분의 유적이다
그러나 맏아들 김계권은 출세길로 나아가 다섯아들 중 막내인 영수가 영천군수를 지냈고 김영수의 아들 3형제 중 맏이 영과 둘째인 번이 모두 문과에 올라 이때부터 중앙에 진출하여 명문 토대를 쌓는데 특히 둘째 김번의 후손들은 서울 장동의 청풍계(청운동)에 세거하게 된다
이후 장동파는 크게 번성하여 청음 김상헌의 후손중에 왕비가 셋, 임금사위가 둘, 정승이 15명, 판서가 51명 관찰사가 46명, 시호를 받은 이가 49명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들이 세도 정치의 주역인 안동김씨 집안이다
이에 반해 맏이 김영의 후손은 소산으로 낙향하여 조용히 살았다. 그리고 텃밭을 지키며 고고하게 세거해왔다
서울장동파는 소산을 본향으로 잊지 않았다. 김상헌이 병자호란때 항복문서를 찢고 단식으로 척화를 주장하다 여의치 않자 이곳으로 내려와 칩거하면서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짓고 심양으로 끌려갈때 까지 여기서 살았다
결국 세도 안동김씨와 안동양반과는 그 입지와 삶의 방식이 오히려 정반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루한 양반들은 국제정세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조선이 청나라와 전쟁을 할 수 있는 군사력, 경제력을 무시하고 명분만 내세우게되는 우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전략적으로 조선은 청이 중국을 통일하는 데 동반자적 위치에서 기여함으로서 만주 북간도 영토등을 우리것으로 할 수 있는 기회을 얻을 수 있음과 동시에 동북아 중심세력으로 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 이후 이미 망한 명을 숭상하고 청을 멀리하는 명분위주 외교를 지속함으로서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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