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내동기들

안동, 농암유적단지내 애일당 - 오토산.

아까돈보 2015. 6. 12. 15:06

 

사진이 잘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8236

 

 

어버이 늙어감에 아까운 시간 애일당과 농암유적

농암유적단지에서 애일당.강각.명농당.농암유적비등을 탐방하는 시간을 가졌다.

 

애일당(愛日堂)은 농암선생(1467~1555)의 별당건물로 중종7년(1512)  46세때

취병산기슭 농암바위 위에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처음 지었고 명종3년(1548)에 중창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영지산 남쪽기슭으로 옮겼다가 2005년 현 위치로 이건했다.

농암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산수와 전원을 벗 삼아 강호가도(江湖歌道)의 詩歌를

읊조리던  유서깊은 장소로 '94세어버이의 늙어감이 아쉬워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이라 하였으며

 

 강각(江閣) 애일당앞의 작은집으로 당대의 선비들과 함께 모여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풍경에서 강호지락을 즐기시며 문학을 남기신 강위의

루각이었으며

 

애일당과 강각이 있는 담장 앞에는 농암각자가 있는데 앞면을 다듬은 네개의

자연석 암반에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란 음각된글씨가 있었는데 

 애일당을 옮기면서 처음 있었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암반에 새겨 놓았던 글씨를

글자부분만 잘라서 옮겨 놓은것으로 암반을 훼손하지말고 글자만 모사해서

읆겼더라면 자연훼손은 없었을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농암 각자의 글씨는 해서체로 下溪의 명필이었던 이강호선생이 썼다.

'농암'은 이현보가 태어나고 자란 분천 강가의 큰 바위 이름이었으며

훗날 이것을 호로 삼았다.

 

명농당(明農堂)은 1501년 농암선생 44세때 고향에 지은집으로 벽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고 4년뒤 휴가를 얻어 명농당에 시를 써서 붙이고

다시 한번 귀거래의 의지를 다졌지만 '부모님이 계셔서 아직은 그만둘수

없다'고 하였다는고 하는 집이다.

 

 농암선생신도비는 분강서원 옆에 있었으며 명종20년(1565) 선생 사후

십년후 세워졌으며 높이1.9m 폭0.84m로 비문은 인재 홍섬이 지었고 글씨는

여성위 송인이 썼다고 하며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들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神道란 신령의 길이란 뜻이다.

 

애일당을 돌아보며 농암이 일흔이넘은 나이에 부모님을 위하여 아홉 노인을

모시고 이곳에서 어린이 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면서 연회를 하였다하여

효절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이 연회를 '애일당구로회'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농암유적지의 탐방을 마치고 청양정사로 향했다.

세상사 한마디

농암선생은 1542년 벼슬을 그만두고 성문을 나와 친지들과 이별하고

한강에서 돌아오는 배를 타고 술에 취해 배안에 누우니

달은 동산에 떠오르고 돌아가는 즐거움이 더욱 깊어져

스스로 웃음지으며 시를 읊으니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 받은 까닭으로

 효빈가(效嚬歌)라 불렀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歸去來 歸去來) 말뿐이오 가는이 없네

전원이 황폐해지니(장무:將蕪하니) 아니가고 어쩔고

초당(草堂)에 청풍명월이 나명들명 기다리나니♣

효빈(效嚬) : 추녀가 미인의 웃는 모습을 본떠 찡그린다는 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