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잘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8522
충과 효가 깃들어 있는 예안이씨 충효당
예안이씨 忠孝堂은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충신의장(忠信義將)
풍은 이홍인의 충과 그 9세손인 효자 용눌재 이한오의 효정신이 깃들어 있는
종택이다.
예안이씨 시조인 이익의 6세손인 장자 영(英)의 후손이 살던곳이 사직공파 구택,
차남 전(筌)의 후손이 살던곳이 현재 곡강정이 있는 터이며 셋째인 훈(薰)의 후손이
상리종택에 살고 있고 전의 둘째인 홍인(洪仁)이 하리 충효당의 파조가 되며
큰댁에서 출가하면서 1551년 지어졌다고 한다.
풍은 이홍인은 임진왜란시 의병을 도와 왜군과 싸워 많은 전공을 올리고 순국하였으며
1811년(순조11) 충신 정려가 내려졌고 후손인 용눌재 이한오는1812년(순조12)에 효자
정려를 받으면서 이 두분의 충과 효의 뜻을 기리기 위해 쌍수당(雙修堂)을 지었다.
안채에는 전면의 두리기둥3개와 부억의 팔각기둥으로 3.8의 수를 나타내어 仁을
표현하욨고 사각의 문틀의 4괘받침과 중보의 팔괘받침, 문간채와의 연결부분
다락에 제수를 차리는 공간등 특색이 있는 건물구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쌍수당에는 마루부분의 두리기둥 9개와 방부분의 사각기둥 4개로 4,9의 수로
義를 표현하여 안채와 정자의 구조에서 仁義와 忠孝사상을 찾아볼수 있었다.
쌍수당의 현판에 또우(又)자 두개의 받침으로 써져있었으며 쌍수당은 충과 효
두가지를 닦는다는 뜻이고 효는 백가지 행동의 근원이라는 뜻의
백원당(百源堂) 현판도 걸려 있었다.
이홍인(1525~1594)은 어려서 부터 담력이 빼어나고 무예가 출중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수신재가로 본분을 닦기에 힘쓸분 드러내지 않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시은당 진과 경 형제와 삼종질인 율원.공등과 협의 사재로
무기를 제조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다인.구담등의
왜적을 물리치고 구담전투에서 순국하였으나 공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못내 아쉬워한 사림에서 공적을 청해 1811년 공의 충의를 표창하였다고 한다.
이한오(1719~1793)는 홍인의 8세손으로 효행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시중은
일체 하이네게 시키는 법이 없이 몸소 받들었으며
아버지의 병에 잉어와 꿩이 특효라는 말을 듣고 엄동설한에 낚시를 드리우고
온종일을 기다려 밤중에 잉어를 구하여 들어오는 길이 어두워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고 하며 뒤산에서 꿩한마리가 절로 날아들어 이치탕(鯉雉蕩)을
달여 드시고 아버지가 쾌유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충효당에서 이준교 종손님을 뵈었는데 TV에서 효성에 대하여 소개된적이 있어
낫이 익은 얼굴이었으며 가문의 내력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많은 도움을
주시었고 정원까지 나오시며 배웅하여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리며
우리는 침류정으로 향하였다.
세상사 한마디
지헤로운 사람은 근심과 걱정이 있을때도 나약해지기 보다는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려 모든 일을 잘 이겨나가는 사람이고
베풀줄 아는사람은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작은것에서 부터
진정한 사랑을 나눌줄 아는 마음이 포근한 사람이다.
문간채
정면의 두리기둥
팔각의 기둥
사가의 문틀
문간채와 연결된 다락
입구의 연못
두리기둥과 사각기둥
충효당에서 바라본 풍산읍
충효당에서 침류정가는길에 있는 낙귀헌
'멋있는 내동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동시 풍산읍 하리 전의이씨 침류정 - 오토산. (0) | 2015.09.09 |
---|---|
영주, 소백산 밑의 제자집을 찾아서 - 처음처럼. (0) | 2015.09.09 |
안동 풍산 우렁골의 예안이씨 상리종택 - 오토산. (0) | 2015.09.08 |
안동 내앞마을 작은 뜰 음악회 - 처음처럼. (0) | 2015.09.07 |
충북 충주 관아공원 - 오토산. (0) | 2015.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