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내동기들

안동시 풍산읍 하리 전의이씨 침류정 - 오토산.

아까돈보 2015. 9. 9. 23:21

 

 

 

사진이 잘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8523

 

전의이씨 풍산하리 침류정

 

 

충효당을 돌아보고나서 마을윗산에 있는 침류정과 존경사를 찾았다.

 

전의이씨의 시조는 고려개국공신 이도(李棹)로 부터 시작되며 7세손 이천(李仟)의

3형제중 맏이 자원.둘째 혼.세째 자화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앉히며 이자원의 증손 이부판사 이사례는 목숨을 잃었고

그의 아들 전농장 李雄이 숙부 송월당 이사경을 따라 안동 소산리로 은신한다.

이웅의 아들 7형제중 둘째 이화(李樺)가 급제하여 세종때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벼슬에 물러나 소산마을에 침류정을 짓고 만년을 보내고

셋째 강이 의성김씨 도만호 김천의 따님과 혼인하니 이분이 삼강행실도에 오른

열녀 김씨부인이다.

이화의 7세손 李山斗(1680~1772)는 불천위로 영조대에 어필영정을 하사받았다.

 

침류정은 이성계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풍산으로 내려온 전의이씨 전농장 이웅의

둘째아들 양정공 이화(李樺 1391~1459)를 추모하는 정자로 당초건물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1779년 하리의 중마을 뒷산에 중건하였고 1899년 하지산 기슭으로

이전하였다가 1936년 우렁골 지산사 뒤편 언덕으로 이건하였다.

침류정앞 존덕사에는 양정공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매년 3월 중정 향사를 지낸다.

 

枕流亭은 중국 진나라 초 풍익태수를 지낸 손초가 젊었을때 고사를 인용한것으로

손초가 죽림칠현처럼 속세를 떠나 산림에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친구인 왕제에게

"돌을 베게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는 생활을 하고싶다(枕石漱流)"를 해야

할것을 반대로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로 베게삼겠다(漱石枕流)"고 말했다.

王濟가 웃으며 실언임을 지적하자 손초는 서슴없이 "흐르는 물을 베게 삼겠다는

것은 옛날 은사(隱士)인 許由와 같이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때 귀를 씻기 위해서고

 돌로 양치질 한다는 것은 이를 닦기 위해서 라네"답을 하였다.

따라서 침류라는 정자이름은 벼슬살이의 속세를 떠나서 산림속에서 자연을

벗삼아 지내겠다는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이화는 세종2년(1420)에 사마시에 무관으로 벼슬에 나아가 2년후 문과급제하여

경상도좌절도사.가선대부.병조판서중추부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벼슬을 하였고

중종때 청백리로 뽑혔으며 단종원년에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무례하다는 상소를

올려 정인지.이사철.신숙주등으로 부터 탄핵을 받아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며

단종이 페위되고 향리 안동에 낙향후 여러차례의 부름에 나가지 않고 단종에

절개를 지켰고 소산마을에 침류정을 짓고 당호를 야소헌이라 하여 제자들을

길렀으며 세조5년 별세하니 양정이란 시호와 숭정대부 벼슬을 내렸졌다.

세상사 한마디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은 억울한일로 참을수없는 순간에도

감정을 억제하여 깊은 인내심을 갖고 참고 기다릴줄 아는 사람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남의 허물과 단점이 보일때도 쉽게 드러내기 보다

넓은 가슴으로 감싸않으며 기도해주는 사람이다.

 

 

 

 

 

 

 

 

 

 

 

 

일성당은 이천의 맏아들 이원의 현손 이웅의 후손 이문한이 1680년경 지었다고 하며

정자이며 주인은 이종훈씨라 하고 당호는 매일매일 반성한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