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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뿌리깊은 신분제도 - 之

아까돈보 2017. 2. 20. 22:47





●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신분제도

 

blog.naver.com/dna327/30182483965   DNA전사



전통시대에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라는 없었다.

 

인류의 문명 발달 과정도 따지고 보면

강한자가 약한자를 지배했던 불평등한 사회가 

대두됐기 때문에 비로소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신분제도 역사는 유구하다.

다만 시대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었으니, 대략 다음과 같았다.

 

삼국시대 : 귀족 - 평민 - 노비


 

전통시대 신분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이유는 '세습'이라는 데 있다.

 

삼국시대 신분 제도를 3단계로 구분 짓는 이유도 

바로 이런 명확한 세습적인 신분에 있다.

 

다만 신분별로 구체적으로 몇% 비율이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일본 나라현 정창원에 보관된 통일신라 시대의 고문서를 통해

당시 청주 부근 4개 부락의 구성비율이

귀족 10%, 평민 80%, 노비 10% 정도 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다.

 

 

고려시대 : 귀족 - 중인 - 평민 - 노비

 

 

 

고려시대에 오면 4개 계층으로 한단계 늘어난다.

 

'중인(중류층)'이라는 하급 관리나 지방의 호족세력(향리)이

세습적인 신분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실상 조선시대와 똑같은 사회구조였다고 보면 된다.

 

다만 양민 중에서는 노비는 아니었지만

노비 못지 않게 차별대우를 받던 세력들이 있었으니,

향·소·부곡의 주민들이었다. 

 

만약 향·소·부곡의 주민들을 노비와 같이 취급하면

고려의 천민집단은 총 30%가 된다. 

대략 조선 초기 노비의 비율과 비슷해진다.

 

 

조선시대 : 양반 - 중인 - 평민 - 노비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와 똑같은 '양천제'였다.

 

다만 그 비율에 있어 차이가 좀 있었다.

 

조선 초 양반 10%, 중인 10%, 평민 40%, 노비 40% 정도였는데

 

17세기를 분기점으로 이전시대에는 점차 노비가 늘어나고

이후로는 노비는 줄고, 양반은 늘어나게 된다.

 

그러다가 19세기 들어서는 국민 대다수가 양반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 조선시대 노비의 수는 왜 갑자기 많아지게 됐나?

 

고려시대 이전까지 전체 인구의 10% 정도에 불과했던 노비의 수가 

조선시대가 되면 대폭 증가하게 된다.

 

절정기였던 17세기 초 무렵, 

조선 전체 인구의 60%가 노비였던 적도 있었다.

 

조선시대 노비는 왜 이렇게 많아졌던 것일까?

 

흔히 다른 나라의 경우 노비(노예)는 

전쟁 포로를 통해 많이 얻어지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가끔 왜구를 붙잡아 노비로 쓰기도 했는데, 

왜구 노비들은 어찌나 사납게 굴던지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주인댁 여자를 강간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북방의 여진족의 도적들을 붙잡아다가 

노비로 삼은 기록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숫자는 아무리 보태어도 얼마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노비들은 죄인이나 포로 때문에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가장 큰 원인은 가난이었다.

 

일명 빚을 져서 노비가 되는 경우를 '부채 노비'라고 하는데

조선 이전 시기에도 '부채 노비'는 늘 있어왔다.


 

다만 고려시대 같은 경우는

이렇게 빚을 지면 도망가는 유량민의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호패법 등으로 통제를 철저히 했던 조선시대에는

도망을 가도 유랑민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한 자들은 고스란히 노비로 전락하게 된 것이 조선시대였다.

 

나라에서도 빚 진 자는 

양민이라 할지라도 노비로 삼게끔 법제화 하였으니,

흉년이 한번 쓸고가면 국가적으로 노비들이 급증하게 됐다.


 

여기에 부모 중 한 쪽이 천민이면 자식도 무조건 천민이라는,

일천즉천(一賤則賤) 사상 때문에 

해가 거듭될수록 노비의 수는 늘어가기만 했다. ☞ 참고

 

결국 17세기 초가 되면 

당시 1100만명 인구 중 700만명 가까이가 노비가 되는 사회가 되고만다.

 

 

● 조선 초기 : 노비가 양민이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

 

빚 한번 제대로 갚지 못했다고

한번 노비가 되면 평생 노비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고

 

그 자식들도 대대로 노비가 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는 참으로 막막한 사회였다. 

 

특히 조선 전기는 더욱 그러했다. 

 

1485년(성종 16년) 충청도 진천에 임복이라는 노비가 있었다.

 

그런데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 정부가 몹시도 근심할 때 

쌀 2천 석을 대뜸 국가에 납속하는게 아닌가!

 

쌀 2천 석이면, 쌀 320톤을 말한다. 


 

당시의 기술로는 적어도 논 100만평이 있어야 하는 수확량이다. 

대략 여의도 땅의 40% 크기의 논에서 수확한 수준이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8억원, 당시 관료들 연봉의 200배 정도.

이걸 노비가 국가에 납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일이 알려지자 성종은 곧 대소신료들과 의논했다.

 

 성종

"요즘 돈 있는 양반들도 이러기 힘든데

노비 신분으로 이런 거액을 내주겠다니 참으로 대견스러워."

 

 성종

"뭐 이 정도면 면천 정도는 해줘야 하는거 아님?"

 

그러자 관료들은 결사 반대를 한다.

 

 신하1

"노비들이 납속 좀 했다고 면천을 시키면 국가기강이 흔들립니다."

 

 신하2

"그 많은 쌀들이 어디서 났겠습니까? 

다 주인꺼 삥땅친거 아니겠습니까?"

 

상황이 이러했으니 성종은 참으로 난감했다.

그래서 직접 임복이를 불러서 묻게 된다.

 

 성종

"니 소원이 무엇인고?"

 

 임복

"다른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불쌍한 제 자식들만 어떻게.."

 

하지만 이때도 신료들은 결사반대한다.

 

 신하1

"노비 주제에 어떻게 그런 큰 재산이 생겼겠습니까?

오히려 죄를 묻고 법으로 처리하셔야 하옵니다."

 

그러나 성종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성종

"신료들은 이렇게라도 재산을 내어봤음?

마땅히 포상시키고, 임복이 자식 4명을 모두 면천시켜라."

 

하지만 그래도 신하들은 반대했다.

 

 신하2

"자식 4명은 너무 많사옵니다."

 

 성종

"에잇. 그럼 한 명만이라도 면천시켜.."

 

이러자 노비 임복은 쌀 천석을 더 내다 바친다.

 

결국 토털 쌀 3천석을 바치게 됐으니, 

그제서야 임복의 아들 4명은 모두 면천을 받게된다.

 

여기서 두번 놀라게 된다.

 

1. 조선시대 어이 없는 신분제도

2. 노비의 엄청난 재산

 

한편 임복의 아들들이 면천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번에는 전라도 남평에 사는 '가동'이라는 노비가 

쌀 2천석을 납속하려고 했다.

 가동
"저도 안될까요?"
 

하지만 임복의 아들을 면천시키면서 

원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터라

성종은 가동의 납속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 초기 노비들의 신분상승은 대단히 어려웠다.

비록 노비가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하더라도 양인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 조선 후기 : 쌀 15석이면 면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엄격한 신분제도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17세기 초를 정점으로 

이후 노비의 수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다.

 

▲ 노비문서 불태우는 장면

 

애초에 노비들에게 면천의 길을 열어줬던 것은 조선 정부였다.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노비들에게 납속을 받고서 

면천종량(免賤從良: 천민의 신분을 벗어 양민이 됨)을 시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임복의 예에서 보듯 

초기의 납속엔 상당한 재물이 소요되었다.

 

16세기 초 중종 때는 면천종량을 받기 위해

기본적으로 쌀이 1000석(현재가치 4억원) 정도는 있어야 했다.

 

사실상 노비가 그런 거액을 만질 수는 없었기 때문에

16세기 초까지 납속으로 면천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중엽 명종 때

경상도 지방의 흉년을 구제하기 위해

쌀 100석 정도를 납속하면 면천 종량의 해택을 주게된다.

 

그렇더라도 현재가치 4천만원의 큰 돈이었다.

당시 왠만한 노비들은 한평생 모아도 마련할 수 없는 큰 돈이었다.


 

때문에 이때까지 노비가 납속을 통해

면천을 받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다가 16세기 말 임진왜란 발발하면서 

납속을 통한 노비 면천은 급속도로 행해지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 정부는 재정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노비들에게 납속을 받아서라도 재원을 확충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때의 납속량은 대폭 떨어져 15석 정도였다. 

현재가치로 대략 600만원 수준이다. 

(노비들이 2년 정도 품삯을 모은다면 마련할 수있는 재원)

 

그리고 납속량은 갈수록 떨어져서 

13석이면 공식적으로 면천종량을 받게 되었고

 

18세기에는 돈 100냥 (약 300만원)이면 

노비들도 얼마든지 양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당시 노비의 한명의 몸 값은 30냥 (60만원)이 채 안됐다.

 

아무리 면천의 가격이 쌀 지언정 

노비 자신들의 몸 값보다는 훨씬 비쌌던 것이다.

(조선시대 노비들의 몸값은 말이나 소 반마리 값도 못됐다.) 

 

 

● 서자의 비애? 게으른자의 불평

 

왜란과 호란 등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재정 확보를 위해 국가에서는 

두 가지 종이 쪼가리를 백성들에게 팔게되는데

 

하나는 공명첩이고, 다른 하나는 납속책이었다.


▲ 공명첩과 납속책

 

공명첩이란 돈으로 양반의 관직을 사는 것이었고

납속책이란  돈으로 노비의 신분을 벗는 것이었다.

 

여기에 군역의 의무를 면제해주는 납속면역, 

시험에서 낙방하는 것을 면제해줬던 교생면강첩,

서얼에게 벼슬을 내려주는 서얼허통첩 등이 있었다.

 

가격은 얼마나 됐을까? (참고로 쌀 1석은 현재가치로 40만원 정도다)

 

공명첩 : 낮은 관직은 쌀 30석, 문관(동반)의 관직은 쌀 80석

납속책 : 15석

서얼허통첩 : 겸사복 5석, 무관(서반) 50석, 문관(동반) 80석

 

대략 이러했다.

 

그런데 사극을 보다보면

 

서얼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평생 과거도 못 보고

신세 한탄만 하다가 가는 비운의 인물로만 그려진다.


 

물론 조선 전기에 서얼들의 운명은 그러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공명첩이 남발하던 시대에도

왜 자꾸 신세타령만 하는걸까?


 

쌀 5석만 있어도 비록 양반은 못 되어도 

겸사복 같은 말단 공무원이 될 수 있었고

50석이 있으면 양반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물론 50석이면 큰 돈이긴 하다.


 

그래도 세상한탄만 하고 절망적으로 살아갈 바에는

몇년 바짝 일하여 돈 좀 벌어서 양반이 되고

당당하게 과거 시험을 보는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런식으로 많은 서얼들이 양반이 됐다.)

 

서얼들의 투정은 어찌보면 

게으른자의 불평일수도 있겠다.

 

 

● 한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

 

양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19세기 말에 오면

원래 계급의 명칭이었던 '양반'은 그냥 

'이놈', '저놈' 하듯 '이 양반', '저 양반'하고 부르는 호칭이 된다.

 

19세기 말에 양반은 대략 80~90%는 되기 때문이다. 


▲ 개나 소나 양반

 

대대로 권세를 누리던 문벌 가문의 양반이 있는가 하면,

공명첩을 사서 돈으로 양반이 된 이도 있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와서 양반 행세를 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시대 끝무렵의 이야기일 뿐이고

조선시대 내내 양반의 지배계층으로서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원래 양반이란, 

문관인 동반과 무관인 서반을 함께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4대조, 즉 고조할아버지 아래로 

9품 이상의 관직에 나간 이가 없으면

양반의 반열에서 탈락하게 되어 있었다.

 

고려말 지배층이 비대해지자 

집권 사대부들이 지배층을 축소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하지만 누가 양반에서 물러나고 싶어했겠는가?

 

조선시대 현실은 5대조가 아니라 

10대조 할아버지가 조그만 벼슬이라도 했다면 

무조건 양반 행세를 하려고 했다.

 

다만 당시 과거 시험이라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국가고시보다 더 어려웠던 시험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4대조 안에 후손이 과거에 급제하기란 요원했다.

(기껏해야 30명 안팎 뽑았으니)

 

그러니 어느 집안이나 양반의 대열에서 탈락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양반들은 한번 붙잡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여러 꼼수를 동원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혼반(婚班)이었다.

양반들끼리 사돈을 맺음으로서 양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외가나 처가에라도 관직에 나간 이가 있으면 

양반 노릇 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엽까지는 출가한 딸에게도 재산을 균분하여 상속했으므로 

처가의 재산은 사위에게도 상속되었다. 

 

때문에 가난한 양반은 혼인을 통해 노비와 땅을 얻고, 

양반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한 이는 

양반의 지위를 얻는 정략결혼도 성행했다.

 

 

더 확실한 방법은 동족촌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른바 반촌(班村)을 형성하는 것인데

양반들은 친인척으로 한 마을을 이루고 


 

소수의 양민과 다수의 천민을 부려 

땅을 경작하여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했다. 

 

이런 꼼수로 양반 지위를 이어갔던 이들을 향반(鄕班)이라고 불렀다.



● 가난하면 양반 인생도 끝

 

그런데 무릇 양반이라고 하면

일단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

(물론 조선후기에는 일자무식 양반들도 넘쳐났지만..)

 

 

선비라는 명칭도 실은 여기서 유래한다.

 

때문에 양반 사회내에서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담론을 나눌 수준이 되지 못하면

경멸과 멸시를 받았다.

 

선비들 중에서 혼탁한 조정을 탓하며 

일부러(?) 벼슬에 나가지 않는 사람도 많아 

죽림이니 산림이니 하는 사림의 집단이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벼슬을 하지 않아도 엄연한 양반이었다.

 

정작 양반에서 탈락하는 것은 

경제적 이유에서였다.


 

특히 신분제도가 본격적으로 흔들리던 18세기 무렵부터는 

가난한 양반은 부유한 양인보다 못했고

 

대신 부유한 양인이나 천민은 

돈으로 양반을 사서 양반행세를 하는 

역전 현상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한때 주인과 머슴이던 관계가 처지가 바뀌어

주인이던 사람의 아들이 나중에 

머슴 집에서 종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 참고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도 

가난은 가장 무서운 적이었던 것이다.

 

 

● 자수성가하여 노비에서 양반이 된 케이스

 

노비출신이 양민이 되기도 어려웠던 시절, 

노비가 양반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돈주고 사는 양반 말고, 자수성가해서 양반이 되는 경우)

 

딱 이런 경우만 가능했다.

 

1. 역모를 고발한 경우

2. 국가에 공을 세운 경우

 

조선 선조때 서인 출신 송익필은 

노비인 아버지가 역모를 고발하여 양반이 된 경우였다.

 

그런데 당파 싸움으로 서인이 잠시 밀려나는 시기

 

송익필은 아버지가 노비의 출신이라고 하여 

다시 노비로 환천되었다가


 

서인 세력이 재집권하면서 사면을 받아 풀려나게 된다.

 

그런가하면 세조(수양대군) 때

수양대군 집의 머슴이었던 조득림은 

 

수양대군이 반정할 당시 활약이 대단했다고 하여

나중에 3등공신이라는 개국공신에 봉해지면서

관직과 집과 땅, 노비 등을 재수 받게된다.

 

이후 조득림은 권모술수 등으로 부정축재를 일삼는 등

대단한 권세를 누리기도 하는데..

 조득림

 

조득림이야말로 조선왕조 500년 통털어

노비 신분으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던

자수성가의 1인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조득림과 같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노비 출신들은 

비록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었지만

다른 양반들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다.


 

중종 때 반석평이라는 문신은

노비출신이라는 이유로 

임금과 함께 경서를 논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고,

 

또 임금이 공조판서나 병조판서로 임명하려 할 때 

여러 관료들의 반대를 받아야 했다.

 

그렇더라도 조선시대 

노비가 관료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전부 뒤져도 

노비 출신 관료는 몇되지 않는다.

 

노비들이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길은 

돈으로 관직을 사거나, 

세상을 뒤엎을 민란에 참여하는 일 외에는 없었다.

 

 

● 임진왜란 당시 노비들 : 차라리 일본군이 되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의정 유성룡은 선조에게 고한다.

 

 유성룡

"전하 나라가 위급하오니 노비들의 힘을 빌려야합니다.

이들에게 전쟁 중에 공을 세우면 면천을 시켜준다고 하소서."

 

 선조

"어쩔수 없구나. 그렇게 조치하게."

 

이렇게 당근책이 떨어지자

전국의 노비들이 의병으로 참가했다.

 

 노비

"왜군 목 하나 자르면 상을 주고

둘을 자르면 면천이고, 셋을 자르면 관직을 준다네.."

 

그랬는데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신료들이 들고 일어섰다.

 

 신하

"천민들이 쥐꼬리만한 공로를 핑계로 양반이 되려하니

국가의 근본이 혼란스러워 집니다."

 

 선조

"그럼 면천 취소하라고 해."

 

이렇게 해서 선조는 없던 일로 처버렸다.

 

당시 노비들의 배신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때문에 아예 대놓고 일본군에 가담한 조선 백성들도 굉장히 많았으니..

 

선조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선조

"지금 왜군의 절반은 조선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게 웬 말이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 남긴 '쇄미록'을 보면

 

 의병장

"왜군이 쳐들어 왔는데 아랫 것들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오히려 일본군을 환영해줘서 걱정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의 점령 정책이 동네마다 쌀을 나눠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이었는데

 

사정이 이러하니 평소 사람 취급도 안해주고 착취나 일삼는 

양반네 편에 설 상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왜병이 쳐들어오기 전 한양의 궁성을 불태웠던 것도 

실은 노비들의 소행이었다.


 

모두가 조선의 잘난 사대부들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 뒤로는 어떤 왕도 전쟁을 통한

반상철폐나 노비해방 등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이 거의 없었다.


 

노비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관군에 끌려왔지만 싸울 의지가 없었다.

전세가 조금만 위태로워지면 도망쳐 버리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