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내동기들

징비록의 산실 옥연정사 - 오토산.

아까돈보 2015. 7. 15. 23:59

 

사진이 잘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8362

 

징비록의 산실 옥연정사(玉淵情舍)

옥연정사는 하회마을 건너편 부용대기슭에 화천서원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회마을을 시계방향으로 휘감아 돌다 반대방향으로 바꾸는 옥소(玉沼)남쪽 있고

옥(玉)은 빛을 말하고 연(淵)은 깊음을 말하며 서애선생이 기거하던 서당건물로

선조19년(1585)에 지어졌고 임진왜란을 격은후 1605년 서애선생이 향리로 은퇴하여

이 곳에 은거하면서 국란을 겪고난 회고록인 징비록(국보132호)을 저술한 곳이다.

 

징비록(懲悲錄)은 서애선생이 임진왜란의 뼈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그런 수난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저술로서 임진왜란의 전모를 매우

정확하고 생생하게 파악할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서 그 서문에서 말하기를

'서애 선생은 원지정사를 지은뒤에 마을이 가까워 번거롭고 그윽한 분위기를 누리지

못하여 강건너 부용대 기슭에 터를 잡아 놓았으나 가세가 빈한하여 정사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던것을 탄홍(誕弘)스님이 그 뜻을 알고 건축을 맡고 재럭을 부담

하겠다고 자원하여 1576년(선조9)에 착공하여 10년만인 서애선생 45세때인 1586년

(선조19)에 겨우 완공하였다'하고 선생은 그후 백형의 정사인 겸암정사까지 부용대

층벽을 이용하여 오가며 형제간의 정을 나누었다.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조선중기 문신 류중영의 둘째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성실하였고 기상이 활달하고 당당하였으며 퇴계문하에서 배웠다.

퇴계는 그의 탁월한 인품을 보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찬탄 하였다고 한다.

1566년 25세에 문과급제 1568년(선조1)에 공조좌랑을 거쳐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사간원.병조.홍문관.이조.사헌부.의금부등을 거쳐 1579년 동부승지

1580년 홍문관부제학,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승진

1588년 대제학.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등을 역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

1590년 우의정으로 다음해 이조판서 겸임 이어 좌의정에 올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근무중 이산해가 물러나고 영의정이 되었다가 면직,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서울 수복후 다시 영의정이 되어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1598년 탄핵으로 57세 향리로 돌아왔다가 1600년에 무죄가 밝혀져 복직되었다가

1604년 물러나 1607년 66세로 서미리 농환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옥연정사에는 수학여행온 학생들이 답사중에 있었고 지금 KBS에서는 토.일요일에

'징비록'이 방영중에 있고 8.5.~8.9사이에는 부용대앞 강변에서 형제간의 우애를

담은 뮤지컬 '부용지애'가 공연될 계획이다.

우리는 옥연정사를 떠나 목석원에서 점심을 먹고 충효당으로 향했다.

 

세상사 한마디

임진왜란시에 서애선생과 같은 명재상도 있었고

권율.신립.이순신.이여송등 많은장수들의 활약이 많았으며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동장군의 활약도 컸다고 한다.

평안도.함경도를 지키던 일본군에게 동장군이 찾아와

땅도 얼고 몸도 얼고 마음도 얼어서 사기를 저하시켜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데 큰공을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