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내동기들

안동시 임하면 백하구려(白下舊廬) - 오토산.

아까돈보 2015. 8. 13. 17:32

 

 

사진이 잘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8450

 

 

현충시설로 지정된 백하구려(白下舊廬)

 

 

백하구려는 운천 김용선생 후손으로 안동에서 사람 천석, 글 천석, 식량 천석으로

삼천석댁이라 불릴정도로 가세가 좋았고 백하 김대락선생의 고택으로 1885년(42세)

지었다고 하며 김대락선생은 이 집을 개화기 근대학교인 협동학교 교사로 제공하고

애국게몽운동에 앞섰고 교사로 쓰던 별채 사랑은 없어지고 축대와 초석만 남아있다.

선생은 나라가 무너지자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 독립군기지를 이끌다 1914년 작고

여동생 김락과 집안조카 김만식.김정식.김규식.종손자 김성로가 선생의 뜻을 이어

항일투쟁을 하였고 이들의 공적을 기려 2009년 백하구려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김대락(1845~1915)은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기슭에 산다는 뜻에서 白下라 별호하고

도사를 지낸 우파 김진린의 7남매중 장남으로 출생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부 김현수와족속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손으로 유학적인 삶을 살아왔으며

1905년 안동에 대한협회를 조직해 항일주권수호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사재를 털어

구국운동 전개 1907년 협동학교를 설립 신문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1909년에

신교육이 時措之宜 時中之道라 인식하고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여

영남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1911년 66세의 몸으로 전가족을 이끌고 서간도 유하현으로

망명 이상룡,이동녕,이시영등과 신흥강습소를 설치 경학사 공리회등을 조직하고

자신의 집을 비롯한 전재산을 신흥무관하교 건림자금에 보탰으며 도와 덕이 중심된

유교적 이상사회이면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시대관이 담긴 대동사회를 꿈꾸었다.

만주망명후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닥 1814년

삼원포 남산에서 사망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우리들은 백하구려의 나무그늘에 둘러 앉아 백하선생의 종증손자 되시는분의

상세한 설명과 백년전의 협동학교를 그리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상세한 설명을 하여주신분께 감사를 드리며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세상사 한마디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 세가지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것,더 열심히 일할것, 큰 기대를 가지지말것이며

삶에 소중히 지켜야할 네가지는 마음, 약속, 인간관계,  상대의 마음이다.

이 네가지가 깨어질때는 소리는 나지 않지만 큰 고통을 줄수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