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내동기들

남해안 여행기 - 거제도 포로수용소 (7/2) - 처음처럼 (3).

아까돈보 2016. 7. 11. 05:40



 

 

 

 

 

 

 

 

 

 

 

6 . 25  !

 

 오늘은 6,25 날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노니더라도

의미를 살리기로 한다.

 

삼천포에서 배불리 점심을 먹고

우리는 목적지인 거제로 향하였고

오늘의 의미를 살리기로 하고

사실 우리 일행이 거의다 다녀온 곳이지만

거제도 포로 수용소 공원을 방문한 것이다.

 

한국전쟁당시 사로잡은 조선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기위해

1951년 2 월에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과 수양동을 중심으로 한

거제도 일대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었었다.

 

거제도는 육지와 가까워서 포로를 수송하기도 좋고

당시에는 육지와 떨어져있는 섬이었던지라

포로를 효과적으로 수용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북한 인민군 포로 15 만명과

중공군 포로 2 만명을 포함

최대 17 만 3 천명을 수용하였던 역사의 현장으로

여자 포로도 300 여명 수용되었던 것으로 전하여 진다.

 

그 뒤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에 충돌과 유혈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무법천지에 가까운 수용소내의 치안상태로

수용소장인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석방되는

지금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도 발생하는등

냉전시대의 큰 아픔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역사의 현장이었다.

 

1953 년 6 월 18 일

이승만 대통령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조치로

27,389 명이 탈출하는 역사적 사건도 일어났고

이는 두고 두고 우리들에게 회자되는바가 컷었다.

 

오늘 생각해보니

특히 이곳에 와서 이를 둘러보며 지난날을 돌아보니

참 우리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고

정말 어려운 여러가지를 겪고 살았다.

 

사실 6. 25 때는 우리는 10 대 어린나이였다.

그래서 정말 사변과 이런 포로수용 이야기를 제대로 잘 알지 못한다.

더구나 요즈음 아이들은 물론이고

나이들어 모든걸 겪었다면서 떠들어대는 장년들도

6. 25 를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이곳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내내 상념에 젖고 그때 그시절을 곰곰히 세겨보고 있다.

 

얼마나 슬프고 애닯은 사연이 많았던가 ?

그때 이곳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

 

아니 무엇하고 어떤 인생을 살고 죽었을까 ?

 

일행들 조차 무덤덤 볼것이  별로 없다면서

입맛을 쓰게 다시는데 과연 우리가 정말 여기 그러기만 할건가 ?

 

아프게 ,  정말 아픈 마음으로

역사에서 사는 것을 배우고

몸으로 이겨내었던 그분들을 위해

잠시나마 묵념이라도 올려야 하지 않을 까 ?

 

나는 오늘 이곳을

그러면서 스쳐 지나간다.

 

흔적을 쓰다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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