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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경대학 연수생들이 청송 사양서원을 찾아서
10.15. 거경대학 연수생들이 청송지역 답사에 나서서
첫번째로 파천 중평리에 있는 사양서원을 찾아갔다.
四陽書院은 중뜰마을 筆峰기슭에 아담하게 세워져 '사천의 양지쪽'이란 뜻으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12세손 평산신씨 영해파 시조인 문정공 申賢을 주벽으로
그의 아들 문훤공 신용희와 운곡 원천석을 동서 종향위로 모시고 있으며
사당(華海祠)과 강당(宣敎堂), 동서재와 전사청으로 지어져 있고
華海祠 편액은 백범 김구선선생의 친필이라 한다.
불훤재 申賢(1298:충렬왕24~1377:우왕 3)선생은 본관은 평산, 아명은 夢月,
고려 개국공신 壯節公 申崇謙의 12세손으로 역동의 문하생중 가장 우뚝하였고
격물치지.성의.정심의 학문에 힘썼고 1315년(충숙왕 2) 成均試에서 장원급제,
문하에는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운곡 원천석, 아들 간재 신용희등이 있으며
명나라 태조로부터 금자광록대부 작위를 받고 문정시호를 받은 성리학 개척자,
동방이학의 시조를 포은으로 꼽느데 范世東이 지은 <동방사문연원록>에는
도통연원을 설총-최충-김양감-안향-우탁-신현-정몽주, 이색으로 기록하고 있다.
간재 申用羲(1315:충숙왕2~1382:우왕8)선생은 영해출신, 불훤재 신현의 아들로
1333년(충숙왕20) 생원진사시에 합격한후 문과급제 하였고 문하에 원천석이 있고
명나라 황제로 부터 은청광록대부 작위를 받았다.
운곡 元天錫(1330:충숙왕17~?)선생은 조선 태종의 스승이고 려말선초의 隱士로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이고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며 고려말 정치가 문란함을 알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며 태종이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태종이 머물렀던 자리에 駐畢臺란 표석과 태종대란 비각을 세워 전하고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 두고 잘 지켜라'고 유언하였으나
증손대에 이르러 발각되면 멸문지화가 두려워 불살랐다고 전한다.
평산신씨 영해파 사람들에 따르면 師門禍厄이 잇달아 위험할때 문훤공 신현의
증손 형제를 원주에 숨어살게 하여 성취(成娶) 시켜주어 그 자손들이 청송.영덕에
수천호 살게 되고 1814년 운곡 원천석과 복애 범세동 두선생이 편집한 화해사전이
햇빛을 보게되어 수백년 끊겨졌던 사적을 찾아 성무에 모시기로 결정하였으나
1888년 기호사림에서 계룡산아래 논산에 화해사를 창건하여 신현, 신용희,
정몽주를 배향하였으나 광복이후 농지개혁으로 사당이 사라지게 되어
신현,신용희 두분의 위패를 이곳으로 옮겨와 배향하다가
1966년 서원 현판을 달면서 원천석을 추가 배향하였다고 한다.
사양서원의 마당에서는 쇄석사이에 솟아나는 버섯을 볼수 있었으며
사당참배를 하고 집안과 서원의 유래를 설명을 들은후 상세한 설명을 하여주시고
참배시 창홀하여 주신분들께 감사를드리며 평산신씨종택을 찾아갔다.
세상사 한마디
육신이 약하면 하찮은 병균이 달라들고 입지가 약하면 하찮은 인간마저 달라들며
늙은이는 남은시간을 황금같이 여기지만 젊은이는 남은시간을 돌과 같이 여기며
제철지난 매미소리는 처량하게 들려오고 노인의 웃음소리는 서글프게 들린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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