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내동기들

청송 평산신씨 판사공파종택 - 거경대학 - 오토산 (2).

아까돈보 2017. 10. 24. 15:09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0873

 

 

거경대학에서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을 찾아

 

 

사양서원을나와서 평신신싸 판사공파종택을 찾아가는데 서원에서 안내를 하시던

문중 어르신이 버스를 세워서 본인의 집에 들어가서

 음료수라도 한진씩 하고 가야한다며 집안에 음식을 한상을 차려두었다고 한다.

시간이 바빠 안된디니 과일과 안주를 몇 쟁반을 차에 올려주면서 먹으라고 하여

평산신씨 집성촌인 중뜰마을에서 새삼 풋풋한 정을 느끼며 종택을 찾았다.

 

平山申氏判事公派宗宅은 고려개국공신 신숭겸의 12대손 신현이

 영해군 봉해지면서 寧海派로 분파하였고 불훤재 신현의 손자로

判禮賓寺事 太僕判事인 15세손 신득청을 분파조로 판사공파부르고

이 건물은 1705년경 27세손 신한태(1663~1719)가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별채로 1724년(경종 4) 둔파재 신숙이 이거하면서 遯坡齋를 신축하고

영정각을 이건하였다고 하며 그 후 장손인 안분당 申宗烈이 1744년(영조20)에

 대청, 별묘,안분당, 서당을 건축하였고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마당 우측에 별채가 빗겨 앉아 있고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ㅁ'자형 본채가 있으며  바깥마당 좌측의 장독대는

일반적 부엌가까이 두는 것과는 다르게 배치되었고

 트인담장 밖에 외거노비들이 살던 초가 아랫채가 있는 조선후기 건물이다.

 

理猷軒 申得淸(1332:충숙왕원년~1392:공양왕 4)선생은 형 사직재 신백청과

쌍생으로 간재선생의 아들로 태어나서 10여세에 '我生萬物中 獨與天地參'이란

시구를 지었으며 27세에 형제가 동반급제 하여 1361년(공민왕10) 전라참의겸대언

1366년(공민왕15) 집현전 한림학사, 1371년(공민왕20) 역대전리가를 지어 올렸으며

1372년 조정이 혼미하여 영해 인량리로 돌아왔고

1378년(여흥왕:우왕 4) 이부상서 대광첨의판문합부당상판사 平山君에 봉해졌으며

 

1388년(여흥왕14) 왕이 이성계에 몰려 강화도로 옮겨지고 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날조하므로 종조부 성재공 신치와 형 사직재 백청이 창왕에게 권신의 執命傾國과

상왕의 流離在外와 國姓幻造등 賊臣兇策을 통박하는 밀서를 올렸다가 전가족이

도륙당하였고 선생도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다가 1392년 고려가 망함을 듣고

동쪽을 향하여 통곡하다 동해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자손들은 관향을 平山피하고 寧海申氏로 불렀다 한다.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에도 종손은 거주하지 못한채 괸리되고 있었으며

좌측의 트인담장밖 서당과 영정각, 서당앞의 외거노비 숙소등을 돌아보고

문중에서 나오신 어른분에게 문중의 내력과 종가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들은후 예천에서 온 박갑로회원이 독립운동사에 대하여 보충설명도 하여서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설명을 하여주신분께 감사를 드리고 덕천리 송소고택을 찾아갔다.

 

세상사 한마디

 淸如滾滾水(청여곤곤수)     맑기가 세차게 흐르는 물과 같고

直似落落松(직사낙낙송)                 곧기가 낙낙장송과 같다

直而無尖鏃(직이무첨족)      그러나 곧아도 뾰족한 촉이 없고

淸而無激冷(청이무격냉)             맑아도 심히 차갑지 않으며

可而寬得 保於世라 가히 너그럽게 세상이 보호함을 얻으리라

-포은 정몽주가 본 이유헌 신득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