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안동 하회마을의 양진당, 충효당, 화경당 방문 (2)

아까돈보 2021. 10. 6. 11:25

안동 병산서원을 둘러본 두 지역 회원들은 인근 하회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개천절 날 대체휴일로 3일간 노는 틈을 타서 하회마을에는 전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풍산류씨 대종가인 겸암 류운룡(1539-1601)선생의 집 양진당

(養眞堂)을 찾았다.

사랑채의 처마 아래에는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사랑대청

북쪽 벽에는 이 집의 당호인 양진당 현판이 걸려 있다. 당호는 사랑채의 대청에

걸려 있어서 밖에서는 볼 수가 없다.

입암고택이란 뜻은 겸암과 서애 형제의 아버지인 입암 류중영(柳仲郢)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양진당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동쪽 뒤에는

두 채가 있다. 두 채 모두 불천위(不遷位) 사당이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학행이 높은 사람의 신위(神位)를 모시는데 대(代)가 바뀌어도 영구히

4대까지 사당에 모시도록 허락을 받은 신위를 불천위라고 한다.

이날 늦더위에도 관광객들은 문화해설사를 앞세워 현장 설명을 듣느라 귀기울리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양진당 맞은편에 있는 충효당(忠孝堂)으로 자리를 옯겨 류창해

(柳昌海) 종손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보물 제414호로 지정된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종택이다.

서애 선생은 40여 년의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여도 거처할

집이 없어서 풍산 서미동에서 초간 삼간에서 돌아가셨다.

후에 선생의 문하와 후인들이 선생 사후에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양진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충효당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인 우의정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전서체(篆書體)로

쓴것이다.

건축물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 등 총 70여 칸에 이르고 있다.

종택내에 서애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이 있다.

 

일행은 국가민속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된 북촌댁(北村宅) 화경당(和敬堂)으로

이동했다.

화경당 류세호(柳世浩. (사)경북문화유산보존회 회장) 집주인의 안내로 집 내부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곳저곳을 볼 수 있었다.

화경당은 경상도 도사(都事)를 지낸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공이 철종13년

(1862)에 창건한 것으로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하회마을을 중심으로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크게 북촌과 남촌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 북촌을 대표하는 집으로 양진당과 북촌댁을 들 수 있다.

당호인 화경당은 화(和)로서 이버이를 섬기고 경(敬)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화경당의 품격은 세 군데의 사랑채에서 나타난다.

할아버지가 거처하던 북촌유거(北村幽居), 아버지가 거처하던 화경당,

손자가 거처하던 수신와(須愼窩)가 각각 분리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두리기둥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소금, 재, 고추가루를

썩어서 기둥 밑바닥에 넣어 놓아 나무기둥이 몇 백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지금도 비가 올때면 방마다 군불을 떼어 한옥으로서 보존을 하고 있는 비결을

들여준다.

300여 년의 세월을 품고 서있는 큰사랑채의 뒷편 소나무는 하회마을을 굽어

돌고 있는 강물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높이 5.5m, 나무둘레 1.6m 수령

450년 된 탱자나무도 볼거리를 각각 더해주고 있다.

나는 수차례 하회마을을 방문했으나 북촌댁 내부를 자세히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아주 뜻깊은 방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