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풍경

불교의 고향 인도 성지순례.

아까돈보 2011. 11. 23. 18:30

 

 

Subject: 불교의 고향 인도 성지순례

 
      
                          불교의 고향 인도 성지순례 글 
1999년3월14일 부처님의 체향이 그윽한 불교의 고향을 참배하기 위해 17명의 흥륜사 불자들과 함께 
순례 길에 오른다. 밤7시 50분 김포공항을 이륙한 항공기는 9시간을 비행하여 15일 새벽4시 인도의 
수도뉴델리 국제공항에 착륙한다. 
[3월15일]   뉴델리 
3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오늘 길이 멀어 아침 6시에 금강경으로  예불을 올린다. 야무나의 물줄기가 
굽어 도는 낮은 언덕에 위치한 인도의 수도 뉴델리는 명실 공히 인도를 대표하는 도시다."델리"라는 
지명이 기원전 13세기부터라하니 수 천 년의 문화를 가진 고도(古都)이다. 


 
뉴델리 도심에서 외곽까지는 숲이 우거져 있고 흰 고층건물과 붉은 벽돌 집들로 조화를 이루면서 
이국적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가로수는 일년 내내 망고나무와 파초들로 항상 싱그럽고 외교관 
거리에서 대통령 궁에 이르는 연도는 아름답고 주거환경이 쾌적해 보인다. 
 
그러나 변두리는 여전히  천막을 치고 사는 난민의 움막이 많고, 풍경도 황량하여 인도하면 가난 
더러움 악취를 연상하지만 뉴델리 도심에는 별로 눈에 뛰지 않는다 최신형 차량이 질주하는 도로 
복판거리로 유유히 걸어 다니는 소떼들의 나들이가 한가롭게만 보인다.
관광객을 위한 좋은 버스라지만 출고된지 오래되 에어컨이 아예없는 차를타고 5시간 넘게 달려 
뉴델리남쪽 200km에 위치한  아그라 타지마할에 도착 한다. 
                            신비의 궁전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아그라에 있다.아그라는 인구 80만의 도시로서 16세기 중엽 회교왕국 무갈제국의 제3대 
황제 아크발에 의해 세워졌고, 타지마할이란 성때문에 유명한 도시로 발전한 곳이다. 
인도에 무갈왕조가 들어서면서 집중 개발한 곳이 아그라였기 때문에 도시곳곳에 이슬람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타지마할은 무갈제국의 5대왕 샤쟈한이 그의 아내 "몸타즈"를 위해 만든 무덤 궁전이다. 
몸타즈는 13명의 왕자와 공주를 두었다.샤쟈한이 북부의 정복전쟁 때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패하고 상심에 빠졌다.그리고 아내를 위하여 역사상 전대미문의 이 궁전을 만들기로 했다.

1630년 역사를 시작하여 28년동안 이 궁전을 완성하였다.내부의 현란한 규모가 세상의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방대하여 사람들은 피라미드와 더불어 이곳을 인류의 불가사의라 말하고 있다. 
궁전은 양파처럼 둥근 지붕과 건물 주변으로 원통형의 탑을 세웠고,내부는 온통 보석장식으로 뒤 
덮었는데 1층에 두개의 관은 도굴을 막기위한 위장이고 지하의 비밀통로에 진짜 관이 놓여 있다. 
국내외 장인 5천명을 동원하여 이 궁궐을 짓고,다시 이 같은 집을 짓지 못하게하려고 기술자들의 
손을 모두 잘랐다하니 그 원한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무심한 사람들은 궁궐 앞에서 환호를 
지르지만, 알고보면 오히려 한숨이 나온다. 

샤쟈한은 결국 국고를 낭비하여 파멸을 자초하였고,그의 아들 아크바르에게 강제로 유배 되었다.
그의 국력 낭비는 무갈 제국을 멸망으로 초래하고 말았다.샤쟈한은 철저한 회교도로서 치세 때 
가혹하게 다른 종교를 탄압하였으나,그의 아들 아크바르는 흰두교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왕국의 
안정을 도모한 왕이다.순례자들은 야무나의 물줄기가 도도히 흘러 내리는 강변에 우뚝 선 타지
마할의 건물과 역사를 카메라에 담아 다음 행선지로 간다.
이곳에서 버스로 몇시간을 달려가니 아그라 기차역이 나온다.여기서 부처님의 설법지 바라나시
(갠지스강)로 가려면 야간열차를 타고 밤을 새워 달려야 내일 아침 도착하게 된다. 
아그라역사는 고객을 위한 시설이라곤 없다.무두 시맨트 바닥에 그냥 앉아 2시간을 기다렸으나 
약속한 시간에 열차가 오질 않는다. 

인도여행을 하다보면 한두 시간 연착은 흔히 있는 일이다.저녁 대용으로 식빵에 고추장을 발라
 김에 싸서 먹고 있는데,역사를 서성이던 굶주린 개들이 마구 달려든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저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몇조각 던져주자,서로 차지하려고 역사가 떠나 갈듯
다투는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이렇게 몇 시간이 지난 밤8시 기차가 도착하여 피곤한 몸을 싣고
아그라의 밤을 가르며 태양이 솟는 바라나를 향해서 달린다. 

                            [3월16일]  바라나시의 갠지스강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바라나 땅에 내리니,도시의 모습은 꼭 한국의 60년대를 보는 것만 같다.
낡은 건물과 쓰레기가 여기저기 쌓여 있고,무질서한 교통체계와 길 한복판으로 유유자적하게  걸어
다니는 소들이며, 할 일없이 서성대는 사람들로 뒤엉켜 어지럽고 복잡해 보인다.

순례단은 택시에 나누어 타고, 상인들과 사람들로  북적대는 좁은 도로를 따라 성스러운 강 진리의 
발상지 갠지스에 이른다.바라나시는 세계에서 가장오래 된 도시이고,갠지스강물은 히말라야의 빙하
가 녹아내려 인도평원을 가로질러 뱅골만으로 흘러간다. 힌두의 성지 수없이 많은 사원들이 들어서
이 도시는 수천년 전부터 종교의 메카이다.

인도인들은 갠지스 강물을 성수로 숭상하며 그곳에 목욕함으로써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고,죽어서 
이곳에 뼈를 뿌리는 것을 최고의 영광스러움으로 여긴다. 부처님이 이곳을  전법의 첫 번째 장소로
택한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부처님 당시에는 이 도시를 "베나레스"라 불렀다. 
                       갠지스 강물은 어떠한 곳인가? 

사람의 시체를 화장하는 곳을“가트"라 한다.바라나시에는 이"가트"가 수십여 곳이 넘는다.가트에 
이르는 길가에는 셀 수많은 담요덩어리가 뒹군다.그 담요덩어리는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매일 아침 경찰들이 그 담요를 들쳐보고 죽은 이는 화장터로 보내고, 숨이 붙어 있으면 그냥 방치
해 둔다. 모든  인도인들은 이 갠지스에 뼈를 묻고 싶어하기 때문에 늙은 부모에게 가장큰 효도는 
어버이를 이곳에 모시는 일이다. 큰 부자인 경우는 이 강변의 가트에 방을 얻어 부모를  모시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꿈 같은 이야기다. 

심지어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에 어버이를 태워 드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한다.갠지스강에는 인골이
흐르고  강물을 열심히 퍼마시는 사람,목욕으로 자기의 죄를 씻는 사람,기도의 주문을 외우는 사람
들로 아침의 갠지스는 북적댄다.순례단은 인도역사와 문화를 안고 흐르는 갠지스에 연꽃 등에 불을
밝혀 강물에 뛰워보내는 기도를 올린다.

                           불교의 발생지 녹야원  
"녹야원"은 갠지스강 건너 동북쪽으로 십여리 거리에 있다.입구에는 초법륜을 기념하여 아쇼카 왕이
건립한 다메크 대탑이 있다.벽돌과 흙으로 원형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발우를 엎어 놓은 듯한 원주를
세웠다.이 대탑을 세운연기는 아쇼카왕의 석주가 상세히 설명한다.또 석죽에는 "승단의 화합을 깨지
말라"는 언급도 있다. 
건물은 하늘 높이 솟아있고 사방으로는 긴 복도가 이어져 있어 이곳에서 천5백 명의 수행자가 공부
했음을 알 수 있다.동남쪽에 있는 석가탑은 높이가 백여 척으로 아쇼카 대왕이 새운 것이다.

그 아래는 높이 70여척의 석주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석존께서 초전법륜을 펴신 곳이다. 서쪽에는 
부처님이 목욕하시던 연못. 식기를 씻으신 곳. 법의를 세탁하시던 연못이있다. 녹야원을  대규모로 
복원한 것은,12세기 초 고빈다 찬드라 왕비 쿠마라데비의 독실한 불심에 의해서였다. 
녹야원에는 티벳 중국 일본 태국 스리랑카 절들이 즐비하게 서있다.입구의 사르나트박물관에는 불교
유물만 전시되고 있었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아쇼카 대왕의 석사자 석주이고,관음보살상과 미륵보살
입상이 걸작품이다. 
이곳에서 성도하신 보디가야까지는 약219km로서, 부처님은 그곳까지 걸으셨다. 자신의 지고 至高한 
깨달음이 과연 무지한 중생들에게 이해될 수 있을가를 모색하시면서 그분은 이길을 걸으셨다.불전은
이곳에 부처님이 자신과 함께 수행을 한적이 있던"다섯 비구에게 최초설법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의 최초설법  

“비구들이여! 삶은 고통이다.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죽어야하는 것 모두 고통이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원한이 있는 자와 만나는 것도 고통이고, 하나 얻어지지 않는 것도  
고통이요,번뇌의 숲에 뿌리 내린 이 몸이 존재하는 것도 고통이니라. 무엇이 이 고통의 근본이랴? 
성내고,탐내고,어리석은 것,이 세 가지가 모든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이니라.그러므로 열반이 으뜸
이니 여덟 가지 바른 수행(八正道)과 고집멸도(苦集滅道)네 가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곳이 바로 최초로 가르침을 펴신 곳이고, 불교가 발생한 고향이 바로 이곳 녹야원이다. 순례단은 
녹야원 불탑에 백팔 배를 올리고,그 옛날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모습을 회상하며"사성제와 팔정도"
를 내용으로 법회를 연다. 참배를 마치면서 불교 발생지의 거룩한 뜻을 담아오기 위해 녹야원 탑신
벽돌 하나를 간직하고,5백리가 넘는 먼 길을 버스로 달려 붇다가야 수자타호텔에 도착하니 앞을 볼 
수 없는 밤이 내린다.  
                            [3월 17일]  붇다가야 
 
이른 아침 수자타호텔에 마련된 불단에 예불을 올리고,버스로 10여분거리에 있는 마하보디사원으로
으로 간다. 싯달타 태자가 부처님으로 새롭게 태어난 붇다가야 성도지는  가야라는 도시에서 10km
남쪽에 있다. 붇다가야는 기원 후 10세기까지 모든 순례자들의 메카이다. 
지금 스리랑카 스님들이 보리수나무를 중심으로 대각사를 세워서 성지를 지키고 있고,1960년 이후
미얀마 중국 태국 일본 티베트 사원들이 들어서 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리수 나무는 벽돌로
쌓아서 보좌를 만들어 놓았다.
 
순례단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기리기 위해 보리수나무 아래서 입정을 가진 뒤, 석가모니불  정근으로 
예불기도를 올린다. 보리수는 피발라 나무였는데, 부처님께서 이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보리수라 부르게 되었다.마하보디사원 정문은 동쪽으로 나있고,니련선하강을 향하고 있다.
6년간 고행 하신 싯달타는 먼저 니련선하 강에서 몸을 씻으신 다음, 수쟈타 여인이 올린 우유공양을
받으신 후 보리수나무 밑에서 정려에 들어갔다. 
 
7일째 되던 날 새벽 먼동이 틀무렵 드디어 확연한 깨달음이 싯달타에게 다가왔다. "무엇이  인간의
생존을 윤회 속에서 허덕이게 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과연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그 모든 문제들을 한껴번에 대각을 성취하였다.이곳이 그 깨달음의 현장이다. 
 
순례단은 부처님 해탈의 상징인 해탈보리수잎 하나씩을 선물받고,마하보디 사원의 대승정께서 선물 
하는 가사 한 벌을 봉증받은 뒤 다음의 행선지로 발길을 돌린다. 
                                  고행설산과 니련선하 강  
 
니련선하강은  보드가야에서  2백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싯달타  태자가 수쟈타로부터 우유
공양을 받고 목욕을 하셨다는 성스러운 강이다. 푸르고 시원스런 강물이 흐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갔을 때는 건기철이라  넓은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몇 그루의 보리수나무만 
순례단을 반기며 흐르는 땀을 식혀준다. 강건너로 바라보이는 저 높은 심산이 바로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셨던 그 설산이다. 
                                법화경의 설법지 영축산 

영축산靈鷲山은 독수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인도 남부지방은 산이 별로 없지만 이곳은
물도 흐르고 우거진 숲사이로 독수리처럼 생긴 검은 바위들이 우뚝우뚝 보인다. 
 
날씨가 무더워 걸어 오르기가 힘들 듯하여 케이블카로 정상에 오른 뒤, 붉은 황토 빛 돌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허 허 넓은 평원이 시원히 내려다 보이고,산중턱 바위위에 그 옛날 법화경을 설하셨던 
설법지가 나온다.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고,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영산회상을 떠
올리며 법화경“회삼귀일과 會三歸一과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에 대한 법회를 연다.
 
여기서 정상으로 좀 더 올라가면 동굴 두개가 있다. 첫 번째 동굴은 사리불이 공부하던 곳이고,다음 
동굴이 아난존자가 수행하던 곳이라 한다. 
                               죽림정사竹林精舍 

영축산 북쪽에 죽림정사의 옛 터가 있다. 이 사찰은 부처님 당시“칼란다”라는 장자가 대나무 숲이 
우거진 정원에 정사를 지어 부처님께 시주한 유명한 정사로써 교단이 생긴 이래 기원정사  다음으로 
두 번째 절이다.죽림정사터 동쪽으로는 불탑이 하나있는데 이 탑은“아쟈타사투루“대왕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탑이다. 
 
죽림정사 서남쪽으로 2km지점에는 부처님 경전을 최초로 결집하였다는 칠엽굴七葉窟이 있다.경내는 
대나무들이 여기저기 무성히 자라고 있어 죽림정사임을 금방 알 수 있게 한다.
 
                                     나란다대학 
불교학의 요람이던 나란다대학을 찾아왔다.놀랍게도 찬란했던 옛 영광과 위용은 온데간데없고, 대지
위에 말없이 길게누워있어 내 마음을 안타깝고 아프게 한다.한때는 5만명이 넘는 스님들이 불철주야 
부처님의 진리를 탐구하던 곳이 었는데,이제는 무심한 풀 더미에 뒤덮여 세월을 견뎌가고 있기 때문
이다.현장법사가 이 대학에 와서 수학하던 7세기 중반까지도 1만 명이 넘는 스님들이 불타의 진리를 
연구하던 곳 이었는데 어찌 이토록 황량하여 있다는 말인가? 
 
1199년 나란다대학은 무슬림이 침공하여 방화와 살육으로 거대한 켐퍼스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세월의 수레바퀴는 쉼 없이 굴러, 불태운 자도,불에 태워 진자도 남지 않은 원점으로 돌아와 있다. 
그러나 나란다대학이 언젠가는 잡초더미를 딛고 일어나,부처님 진리의 메아리를 울려주게 될 날을 
간절히 기원하며 나란다 대학을 나선다. 
                              [18일]  바이샬리 
바샬리는 부처님당시 가장윤택한 도시었고, 부처님께서 45년간 교화를 위하여 남북을 오고가시며
자주 들리신 곳이다.이곳은 또 유마거사의 고향이자,부처님을 길러주신 마하파사파티 이모님께서 
출가하여 교단에 최초의 여승이 탄생한 비구니의 고향이기도하다.특히 부처님은 이곳에서"자귀의
自歸依.법귀의法歸依.자등명 自燈明.법등명 法燈明"이란 유명한 유교를 남기시고"3개월 후 나는 
열반에 들것이다."라고 예언을 남기고 입멸 처인 쿠시나가르로 떠나신 곳이기도 하다. 
 
커다란 절터와 석주들이 여기저기 서 있고, 큰 호수가 있는 것을 보아, 그 옛날 승원의 규모를 짐작
케 한다. 넓은 평원에는 사탕수수밭과 야자수 망고 숲들이,이국적 정취를 물씬물씬 풍긴다.몇년 전 
파트나에서 이곳까지 갠지스강 위로 10.5km 세계에서 제일 긴 다리를 건설하여 볼만하다. 
이곳 갠지스 물줄기는 야무나 카시아 등 모든 지류가 합해지기 때문에  마치 대해를 보는 것만 같다.  
도도히 흐르는 흙탕물을 보면서 갠지스 강이 왜? 인도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지를 알 것만 같다.
 
열대지방에서물이란 실리성이 절대적이다.부처님 설법에서 나무그늘과 갠지스강에 대한 비유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를 인도성지순례를 통하여 알 것만 같다.  
                              열반지 쿠쉬나가라 
쿠시나가라 열반지는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건 영국 고고학자 
알렉산더 컨닝햄이 1861년과 1862년 두차례에 걸쳐 답사발굴한 후“이곳이 부처님 불멸지佛滅地다” 
라고 확인한 뒤부터이다.
 
불멸 후 약2백년 후 찬드라굽타 대왕은 거대한 통일제국을 마련하였다.그의 손자 아쇼카 대왕은 인도 
남부 일대를 제외한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아쇼카 대왕은 이곳 참배를 하면서 대탑과 석주를  세웠다. 
그 후 관심에서 제외되었던 이곳은(399-414)15년간 인도 불적지를 순례하였던 중국의 구법승 법현에 
의하여 주목받게 된다.
법현은 그때 쿠시나가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힌다. 몇개의 석탑과 사원이 있었으나 황폐화 되고,
마을의 몇몇 가족만이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이 때가 기원후 5세기초 굽다왕조 시대에  해당한다. 
곧이어 쿠마라 굽타 대왕이 등극하였고, 그때 독실한 불자였던"히리발라"가 부처님 열반하신 장소에
큰 법당을 짓고,유적지를 복원하면서 열반상을 모셨는데 지금 법당에 모셔져 있는 이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열반 설법  
부처님의 열반에 대해 경전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북쪽을 향해서 가시던 부처님은"파바" 마을에서 
대장장이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카쿠쯔타 강에서 목욕을 하신 후 쿠시나가라로  오셔서, 45년을 
곁에서 모시던 아난다에게“사라수나무 밑에 평상을 준비하라”명하신 후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우셨다.   
 
"아난다여!쿠시나가라 말라스 사람들에게 전하라.오늘 밤 자정 내가 열반에 든다라고.낡은 수레가 
움직일 수없음과 같이,나는 이제 여정을 멈추고싶구나."이 슬픈 소식을 듣고 사라수나무 곁에 운집
한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가르침을 펴셨다.
"여래의 육신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현상이 무상하다.불법은 깨달음의  진리이기 때문에 현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법에 의지하라.의문이 있거든 모두 물으라"   
고 세 번을 거듭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난을 비롯한 군중들은 터지는 오열을 참지 모해 이상 여쭙지 못했다."모든 것은 덧 없다. 
쉼 없이 정진하라.” 이 말씀을 남기시고,부처님은 열반에 드셨다.이 때가 인도력印度歷으로 사월 
보름날이었다. 순례단은 열반상을  돌면서 석가모니불을 부르면서 부처님의 거룩한 자비와 무량한 
공덕을 기리는 예불을 올린다. 
 
열반당 뒤편에는 원형으로 된 대탑이 서있다. 이곳이 바로  부처님 다비장소이자,그 내부에 진신
사리를 모시고 있어,부처님을 모시는 마음을 담아 탑신의 벽돌하나를 가사폭 속에 넣고 열반지를
나선다.
 
                            3월 19일  최초사찰 기원정사 

새벽5시에 숙소를 출발하여 기원정사로 향한다. 열반지 "쿠시나가라"에서  기원정사는 172km이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는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7시간이 지나서야 기원정사에 도착한다.  
경전의 첫머리에 “부처님께서 어느 때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천 이백 오십 인의 비구와 함께 
계셨다.“ 는 구절은 바로 이 기원정사“를 두고 하는 말씀이다. 불교교단형성에 주추 돌이었던 절
기원정사祇園精舍는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셨던 절이고, 금강경을 설하신 곳이다. 
 
옛날 이곳은 슈라바아스티라 불렀으나  오늘날은 "바람뿌르라" 한다. 부처님당시 슈라바아스티는 
이교도였던 프라세나짓트 왕이 다스리고 있었으나, 부처님이 행하시는 이적 (異蹟)을 친견하면서 
불교를 자신의 반려로 삼았다. 
그때 "수닷타"라는 장자가 이곳에 절을 지어 부처님께 올렸는데, 이것이 불교역사상 최초의 사찰
이다.이 수닷타의 원력으로 이룩된 기원정사는 북인도 불교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사원 경내에는 
십대제자 가운데 아난. 마하가섭.사리불. 목건련과 수닷타 장자 등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부도탑
들이 안치되어 있다. 
 
슈라바아스티 라는 말은 중국어로 번역하면 실라별(室羅伐)이고 우리말로는 서라벌이 된다.서라벌 
이란 말은, 옛 신라의 국호가 되었고, 한국의 수도인 "서울" 이란 이름도 이 "슈라바아스티"라는 
지명에서 유래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수천 년의 세월이 무심히 흘러간 후 순례단이 이곳에 참배를 드리기 위해 찾으니 넓은 정사
터에는 붉은 벽돌만 남아 있고,우거진 숲과 수백 년생 보리수나무만이 기원정사를 지킨다. 
부처님 설법소리가 금방 들려올 것만 같은 기원정사를 불자로써 가꾸고 지키지 못한 송구한 마음을 
느끼며,그 옛날 찬란했던 정사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길 서원하며 금강경 한편을 외운다.  
                               앙굴리 마라를 교화하신  
 
기원정사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많은 사람을 살해한 앙굴리마라가 살던 곳이있다.그는 사람을 죽여고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든 희대의 악인이자 살인마였다. 앙굴리마라는 백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이미 99명을 죽였고,나머지 한 명을 체우기 위해 어머니마저 죽이려던 그때 
부처님께서 그를 교화하신 일화가 앙굴리마라경(經)이다. 
기원정사 뒷산에 부처님께서 이 흉악한 살인범 앙굴마라를 교화하여 아라한 阿羅漢을 만들고 제도한
현장이자, 그 앙굴리마라가 수행하던 동굴사원을 돌아보는 것으로  인도 성지순례를 마치고 국경을
넘어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가 있는 네팔로 향한다. 
 
네팔로 드는 입국수속은 매우 간단하다.모두 차안에 그냥 앉아있고,기사가 대신 국경초소에 여권을 
접수하고 30분가량 기다리자 "와도 좋다"는 여권에 스템프만 누르고 통과시켜준다.기원정사를 떠난
버스는 험준한 산길을 7시간 넘게달려 늦은 밤 인도와 국경을 이루는 네팔 닐바나호텔에 도착한다.
                           [3월 20일]  네팔 룸비니 
부처님 당시의 룸비니는 인도영토였으나, 지금은 네팔국토에 속한다. 대부분 여행자들은 인도에서
이곳을 거쳐 네팔카트만두로 간다.네팔은 관광수입을 주원으로 삼고있어 까다로운 수속없이 비자를
내준다.
 
룸비니가 위치한 지명을 "피프라바'"라 하는데,룸비니 중간 지점에 삼각형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이 있다. 이곳이 경전에 사문유관 四門遊觀으로 묘사되는 태자 때의 싯다르타가 궁성 밖으로 
나갔다가“늙은이,병든이,죽은이,출가사문 등 네 모습을 차례로 보시고,드디어 촐가를 결심하시는  
일화의 고장이다. 
 
불전에는 "룸비니는 사알라 나무숲에 싸인 꽃동산"이라 되어있다. 하지만,지금 "룸비니"는  근대에  
세워진 여러 국가의 사찰과 순례를 온 스님들만 보인다.
유적이 발굴 된 넓은 성지위에는  "우탄트 전유엔 사무총장이 중심이 되어 유엔산하 15개국이 참여
하여유적지의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고 쓰여 있다. 18세기 말까지는 룸비니가  기록에만  전해오는 
성지였으나, 1896년 독일의 고고학자 "휘러"의 비문 판독에 의해 이곳이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로 
확인 되었다. 
인도구법의 시효라 불리는 불국기佛國記의 저자 법현法顯“이 부근 어디가 룸비니인데 길이 험하고 
숲이 무성하여 찾을 수가 없다"라고 술회하고 있다.아쇼카대왕 석주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즉위한지 20년 만에 대신들과 대왕아쇼카는 이곳을 참배하노라.이곳은 인천人天의 공양을 받으신   
 석가세존께서 태어나신 곳이다.나는 그분의 태어나신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돌로써 표적을 삼는다
위대하신 부처님이 태어나신 이곳,대지에는 토지세를 면하노라"이와 같이 쓰인 아쇼카 왕의 석주와
명문이 발견됨으로서 룸비니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과 인간에 거룩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던 날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난 후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 天下唯我獨尊"이라 하셨다. “유아독존"의 뜻은 자신만이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일체생명이 모두 평등하고 고귀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야부인상이 모셔진 법당에 찬불가를 부르며 에불을 올리고,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거룩한 뜻을 
기리며 보리수나무 돌이를 한 후 룸비니를 끝으로  인도성지순례를 모두 마치고 네팔 가트만두로
가기위해 버스에 오른다. 
              글       흘   륜   사    주 지       정   법   륜       합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