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내동기들

안동김씨 소산파와 장동파의 대종가 양소당 - 오토산.

아까돈보 2015. 9. 14. 17:15

 

 

사진이 잘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8536

 

안동김씨 소산파와 장동파의 대종가  양소당(養素堂)

 

 

 

안동김씨 소산파(安東金氏素山派)는사헌부장령 김영수는 세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삼당 김영(1475~1528)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이라 일컬어졌으며

종조부 보백당 김계행은 '이 애는 장차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아이'라 하였는데

문과급제하여 정언,교리,장령등 삼사의 정직을 두루 거쳐 좌승지.이조참의를 역임

하였고 무오사화에 피화된 영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伸寃)되게 하였으며

후손들이 벼슬에 물러나 낙향하여 선비로서 가문을 지켜 장동파의 맏집인

 '삼당파' 를 '소산파'라 부르게 되었다.

 

삼당의 세손자중 둘째 장균 김기보(1531~1588)는 음보(蔭補)로 언양.거창.회인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고을의 민생고를 호소하는 팔폐소(八弊疏 우국충정과 인민제물의

 뜻을 담고 있는 상소문으로 위정자들의 기르침이 되고 있음))를 올렸고

장령 영수의 6대 주손 중일은 홍문관부제학, 구재 김계랑은 經史,천문,역상,지리등을

골고루 섭렵하였고 권충재의 삼계서원 사액상소에 소수로 추대 되었고

동야 김양근은 영남 8대 문장가로 시문에 능하였는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양소당은 소산마을에 있는 장동파와 소산파의 대종가로 500년전 사헌부장령을 지낸

적옹 김영수가 지은 집으로 사랑채,중문간채,안채로 구성된'ㅁ'자형 몸체가 중앙에

자리잡고 오른편 뒤쪽에 사당이 배치되어 있으며 왼편과 뒤편에는 담장을 쌓아

안채에서만 이용할수있는 독립공간을 마련하였고 행랑채와 문간채, 연못이 있었으나

일제시대때 없앴다고 한다.

당호인 양소당은 영조때 형조참의를 지낸 동야 김양근이 '소박하고 순수함을 길러서

풍속을 순박하게 하고 가문의 기질을 질실순고(質實純告)하게 만들겠다'라는 염원을

담아 양소당이라 하고 현판글씨는 이조판서 김학순이 안동부사로 있을때 썼다 한다.

 

양소당에는 담장이 없는 별묘사당(別廟祀堂)이 있는데 1820년 사헌부지평 김병관이

세웠고 1880년 시간원정언 김장한이 수리하였다고 하며 안동김씨 상당파 봉사손이

사망하면 체천위(遞遷位) 신위를 길사를 올릴때까지 모신다고 한다.

 

소산은 정산(井山)과 소요산(素耀山)이 안동김씨의 보금자리이고 이 산의 끝자락에

삼구정(三龜亭)이 있으며 주역의 설계전에서 거북은 이(離), 화(火)라 하였으니

소산의 자연의 형세는 주역에서 말하는 山아래 불이 있는 형상인 산화비(山火비)괘가

되니 비는 꾸미고 장식하는것이고 火는 오행으로 화극금(火克金)이니 김씨가 사는

마을로는 상극이 되는 자연현상이다.

삼구정이 아니더라도 소요산은 게등혈(揭燈穴)이라 불꽃을 밝혀놓은 형상으로 주역의

중화이(重火離)괘가 되어 마을 뒷산에는 불이 있고 마을 앞에도 불이 있으니 김씨가

사는 마을은 쇠가 불에 녹는 형상이니 좋을것이 없다.

청음선생은 산화비의 상구효 "백비면 무구하리라"를 취하여 꾸미지 않은 원래의 바탕

소(素)를 택하여 금산촌을 소산으로 바꾸고 후손들의 자호를 素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양소당에서 종손분과 문중대표들과 헤어져 우리는 삼소재로 향했다.

 

세상사 한마디

성형들이  숭상한 말로 素其位而行 白비无咎, 繪事後素, 以素爲貴라 말하고

부귀는 음란하고 간사해지기 쉽고 빈천자는 비굴하고 쉽게 뜻을 바꾸며

군자는 행동을 바르게 지키고자면 근본이 진실하고 소박하지 않을수 없고

덕을 온전히 지키자면 욕심이 없고 꾸밈이 없는 본래의 마음을 간직해야한다,

소산은 선인들의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고추를 말리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