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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07호 정다산유적 탐방 (3).

아까돈보 2016. 3. 24. 00:09

 


사적 제107호 정다산유적 탐방 (3).

  

우리는 백련사를 출발하여 약 1㎞ 걸어서 힘겨웁게 다산유적에 

도착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대나무로 우거져 있는 이곳은 한적하다

못해 적막감마져 든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여행객들의 목소리가 저만치서

간간히 들려 올 뿐이다.


사적 제107호 정다산유적(丁茶山遺蹟)으로 지정된 이곳은

천일각(天一閣), 동암(東庵), 다산초당(茶山草堂), 서암(西庵),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등이 있다.

전남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으로 그 중 가장 오랜 11년간 머물면서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 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류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

(해남 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초당의 방 안에는 다산의 영정이 모서져 있고 방 옆에는

방명록이 비치되어 있어서 이곳을 찾은 탐방객이나 길손들이

자신의 이름, 주소, 보고 느낀 것을 쓰도록 해 놓았는데 나도

방명록에 이름과 글을 남기고 왔다.


송풍루(松風樓)라고 불리는 동암(東庵)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 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 내었다고 한다.


서암(西庵)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의 산정(山亭)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조만간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草堂)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

(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 년 된 것으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느 시인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

 

 

 

 

 

 

 

 

 

 동쪽에 위치해 있는 다산동암.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보정산방(寶丁山房).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연지석가산으로 흘러 들어온다.


 

 연지석가산.


 사적 제107호 정다산유적 표지석.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영정이 방안에 있다.


 

 

 

 방명록이 비치되어있다.


 

 

 

 서암의 다성각(茶星閣)


 

 

 

 

 

 

 

 

 

 

 다산의 제자 윤종진의 묘.


 

 수백 년 된 소나무의 뿌리가 뒤엉켜 있어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정다산 유적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