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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 탐방 (5).

아까돈보 2016. 10. 5. 16:54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 탐방 (5).


경기도 양평군 두물머리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관광버스를

타고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다산 유적지로 이동했다. 

유적지 진입도로는 깨끗하며 도로변에는 옛날 무거운 물건을

끌어 올리던 거중기(擧重機 : 기중기) 모형을 설치해 놓았다.


다산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다산문학관, 다산기념관,

다산동상, 사당(분도사), 다산선생 묘, 여유당(與猶堂),

거중기, 기념탑, 실학박물관 등이 있다.


다산(1762∼1836)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래리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歸農), 호는 사암(俟菴), 당호는 여유당

(與猶堂)이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다산은 16세에 성호의 글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다산은 22세 때(1783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문학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28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이즈음 "성설"

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은데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여 많은 경비를 절약하였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전라도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이 시기에 다산학의 두축을 이루는 경세학과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 졌으며 50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 경졔, 역리, 지리,

문학, 철학, 의학, 교육학, 군사학,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를 남겼다.

육경사서의 연구서인 경학(經學)집 232권과 일표이서를 포함한

경세학서(經世學書) 138권에 시문집과 기타 저술을 포함한

문집 260권을 합하여 총 492권이다.

이 저술들은 대체로 6경4서. 1표2서. 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한다.


57세 되던 해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였다.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며 여유 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리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이 남긴 유산은 방대한 양의 저술 뿐만 아니라 무거운

물건을 끌어올리는 거중기라는 새로운 기구를 고안하였고

수원화성의 설계자가 바로 정약용이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과학 기술서적을 참조하여

설계하였는데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인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산은 용산과 노량진 사이의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 설계에

참여하여 성공을 거두기도했다.














거중기(擧重機).










다산 정약용 선생 앞 동상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묘



우리 일행은 다산의 묘를 참배하고있다.





여유당(與猶堂)으로 들어가고 있다.












녹로 : 도르레